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위한 자아 성찰
가장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라.
그리고 언제 가장 반짝이는지 발견하라.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곧 나의 자존감을 결정한다.
-『나의 현재만이 나의 유일한 진실이다』김종원 작가-
다정한 눈으로 나를 지켜볼 새가 없었다.
언제 가장 반짝이는지 발견하지 못했다.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탐색이 부족했다.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곧 나의 자존감을 결정할 거라고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많은 현자들이 말씀하시길, 고통과 시련은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한다. 오름에서 그의 악담을 바람 소리에 실어 보낸 뒤, 당신 뜻대로 죽은 듯이 쭈그리고 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충만해졌다. 종일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청소기를 돌리면서, 빨래를 개면서, 저녁 상을 차리면서, 설거지를 하면서. 기가 꺾였다고 앞으로도 쭉 꺾인 채로 살 것이냐, 당당하게 일어설 것이냐는 결국 내 선택에 달렸으므로.
TV에 나오는 잘 나가는 언니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연애를 많이 해봐야 좋은 남자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더라. 회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여러 회사와 상사를 겪다 보면, 나와 궁합이 맞는 회사가 어떤 곳인지 대략 감이 잡히기 마련이다. 기업이 이력서와 면접을 통해 적합한 직원을 선발하듯, 구직자도 자신에게 적합한 회사를 선택할 기준을 명확히 세워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적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나와 회사의 상생 에너지는 궁합이 맞아야 생긴다. 여기서 기업과 구직자 모두에게는 공평한 페널티가 부과된다. 찰떡궁합일지, 웬수가 될지, 미우나 고우나 정으로 붙어살지는 결국엔 서로를 겪어봐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찰떡궁합까지는 언감생심 바라지 않지만, 미운 정으로라도 오래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희망회로를 돌려본다.
아이 등하원 시간에 맞춰 라이딩을 할 수 있고,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할 수 있으며, 갑자기 아이가 아플 때는 병원 진료를 위해 조퇴가 가능한 유니콘 같은 직장이 과연 있을까? 내가 직접 회사를 차리면 모를까, 채용 사이트를 암만 뒤져봐도 그런 직장은 없었다. 눈 씻고 봐도 안 보인다.
이 와중에 무슨 회사와 궁합을 따지고 있는 건가? 배부른 소리 같아 자조 섞인 미소가 지어지지만, 얼른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전처럼 간절함에 눈 양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돌진하다가는, 호되게 넘어져서 얼얼한 충격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차피 최고의 직장이란 없다. 적어도 최악만은 피하자. 그러려면 나란 사람에 대한 이해가 먼저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혹시 저명한 심리상담가인 일자 샌드의 『센서티브』란 책을 아시는지. 이 책을 구입한 2020년 당시에는 무려 24쇄를 찍은 베스트셀러였다. 그만큼 수많은 프로 예민러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안겨다준 책이었고, 나 역시 이 책을 읽고서 유별나다고 생각했던 예민함이 예민이 아니라, 민감한 것임을 깨닫고 더 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다음은『센서티브』에서 '당신은 얼마나 민감한 사람인가' 자가 테스트 중 일부 항목을 발췌한 것이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각 항목마다 자신을 설명하는 정도에 따라 0에서 4까지 점수를 매겨보자. 모두 합산한 점수가 높을수록 민감한 정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물론 가이드라인으로 삼을 뿐, 지나치게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나와있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과연 몇 점인가?
1. 나는 자주 깜짝 놀란다.
2. 나는 고통의 임계점이 낮다.
3. 나는 매우 직관적이다.
4. 나는 쉽게 죄책감을 느낀다.
5.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수 있다.
6.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감동을 느낀다.
7.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8. 예술 작품은 때때로 나에게 깊은 즐거움을 준다.
9. 소음, 강한 냄새, 밝은 빛이 나에게 큰 영향을 준다.
10. 나는 하루 중 혼자 보낼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11. 나는 갑작스러운 일이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12. 내가 일하는 동안 남들이 지켜보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13. 다른 사람들에게는 쉬워 보이는 일이 나에게는 매우 힘들다고 느낄 때가 많다.
14. 누군가 화를 내면, 그것이 나를 향한 감정이 아니더라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15. 타인에게 고통이나 불편, 신세를 지거나 부탁하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피한다.
16. 지적을 받으면 크게 상처받고, 나라는 사람이 쓸모없게 느껴진다.
17. 나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인내심이 약하다고 느낀다.
18. 폭력적인 장면을 보면, 며칠 동안 그 영상이 나에게 영향을 준다.
19. 나는 예민한 안테나를 사용해서 남들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린다.
20. 나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환경에서 휴식할 필요를 남들보다 더 강하게 느낀다.
21. 나는 배가 고프거나 추위를 느낄 때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힘들다.
22. 친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할 때, 머릿속으로 주고받을 말을 미리 정리한다.
23. 다른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언쟁에 내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그 기운만으로 피곤함을 느낀다.
24. 나는 미래에 잘못될 수 있는 일을 예측하고,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25. 나는 대부분 신중하다. 즉흥적이고 빠르게 행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설마 했는데 꽤 높은 점수가 나왔다. 책을 구입했던 5년 전과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매긴 점수를 비교해 봐도, 각 항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합산한 점수가 여전히 높은 편에 속했다.
그렇다. 나는 프로 민감러다.
어릴 적 단 한 번도 예민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던 순종적인 K장녀는 이 테스트 점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센서티브』책에 나오는 몇몇 사례들이 마치 점쟁이가 쓴 것처럼 나를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부정하고 싶었다. 매사에 무던하고 외향적인 사람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우리 사회에서 내향성과 예민함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였으니까.
회사에서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나 힘든 점에 대해 털어놓을 때 남편은 말하곤 했다. 조직 생활을 오래 경험해보지 않아서 스트레스 면역력이 없는 거라고. 아직 유리멘탈이라 견디지 못하는 것일 뿐, 스트레스도 굳은살이 박이면 면역이 될 것이라고 힘을 북돋아줬었다(누가 봐도 T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생각이다. 사람마다 인내심을 발휘하는 분야와 정도가 다를지언데, 남들이 보기에 별일 아니라고 해서 당사자에게도 별일 아니란 법은 없다.
이제 내 안의 민감함을 받아들이고 친구 먹기로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 친구, 직장생활에서 나름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사의 눈빛, 표정, 제스처 등 몸짓 언어만 보고도 심기가 불편한지, 원하는 것이 따로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고, 직감은 높은 확률로 들어맞곤 했다. 덕분에 상사가 원하는 결과물을 적절한 타이밍에 보고하고, 그 결과 3개월이던 수습기간을 1개월로 단축해서 빠른 임금 상승을 달성한 적도 있다.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에 스스로에 대한 기준치가 높은 편이다. 그러다 보니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간단한 문제조차도 심각하게 파고들어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민감한 성향은 어떤 상황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제주에서 일했던 두 군데의 호텔을 예로 들어볼까. 호텔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곳에서 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뉠 것이라 예상한다.
첫 번째 호텔은 그만두고 2년이 지난 뒤에도 꾸준하게 다시 돌아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말 많고 속 시끄러운 현장이었지만, 그곳에서 3년 가까이 버틴 총무는 나 하나였다. 반면 두 번째 호텔은 느리고 답답했던 직원이 뒤끝 안 좋게 나간 것쯤으로 기억할 것이다. 같은 사람이 일했지만, 한 곳에서는 높이 평가받고 다른 곳에서는 저평가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성향이 장점이 되는 곳이 궁합이 맞는 직장이다.
극한의 스트레스로 나를 몰아갔던 두 번째 호텔은 민감함을 자극하는 악조건들이 총체적으로 모인 곳이었다. 내 자리는 직원들 모두가 지나다니는 출입구에 위치해 있어 일하는 모습을 모두가 지켜볼 수 있는 개방형 구조였으며, 매 순간 여러 조건을 고민할 새 없이 빠르게 일을 치고 나가야 하는 현장이었다. 거기다 고성과 폭언을 일삼는 상사가 상시 곁에 있어 내가 욕을 먹든, 남이 욕을 먹든 깜짝 놀라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나와는 상극 중에 상극인 환경이었다. 고생스러운 시행착오를 겪고 뒤늦게 얻은 깨달음이긴 하나,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그렇다면, 프로 민감러로서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위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첫째. 자아를 업무용과 개인용으로 구분하기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으면 집에서도 줄곧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았다. 부정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남편과 아이에게 날카로워진 신경을 태도로 표출하기도 했던 것이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맺고 끊는 것이 불분명했던 건 기분뿐만이 아니었다. 수시로 울리는 카톡 알림과 문자를 못 본 척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실 집에서는 업무 연락을 받는다 하더라도, 모든 자료가 사무실 컴퓨터 안에 있으므로 정확한 답변을 해주기가 어렵다. 머릿속 데이터로 답변을 아무리 잘한다 한들, 전화의 끝맺음은 결국 "출근해서 다시 제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일 텐데 말이다.
카카오톡 방해금지 시간대를 퇴근 시간부터 출근 전까지로 맞추고 배지와 팝업 같은 알림 표시가 아예 뜨지 않도록 설정했다. 어쩔 수 없이 톡을 열어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들어가서 열어보게 되었다. 퇴근 후에도 톡에 일일이 답장을 하느라 육아에 집중하지 못하거나, 다음 날 업무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은 사라졌다.
둘째. 함부로 추측하지 말 것
민감한 사람은 예민한 안테나를 사용해서 남들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린다고 한다. 나 역시 상대방의 말 이외에 몸짓 언어에 즉각 반응하는 편이다. 기대했던 긍정적인 반응이 아닐 때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인지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추측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도 나를 잘 모를 때가 있는데 하물며 타인의 마음을 알아챈다는 것은 교만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자의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한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현상 그 자체로만, 상대의 말은 문장의 사전적 의미로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셋째. 실수에 대한 인정과 해결은 최대한 빠르게, 다만 오래 매여있지 말 것
갑작스러운 일이나 실수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미래에 잘못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데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래서 잘 미룬다. 흔히들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들 하는데, 원인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실수나 실패에 뒤따르는 자책이 심한 편이므로 일단 시작하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크게 차지한다.
스스로에게 엄정한 잣대로 몰아세우고 실수했던 상황을 되풀이해서 떠올리는 것을 그만하자. 시작은 가볍게 하되, 실수는 피할 수 없다는 마음을 먹기로 했다. 다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노력은 유지한 채로.
고통과 시련이 성장의 밑거름이 맞았다. 현자들의 말을 증명하는 일에 영광스럽게 나도 일조한 거 같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스스로에 대해 이토록 깊이 탐구할 기회를 찾기란 까마득했을 수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나의 성향이 장점으로 발현될 수 있는 곳을 찾는 일.
셀프 탐색도 마쳤으니, 기회가 왔을 때 선택하기를 주저하는 망설임은 줄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