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엔 대장금이 살았다
아무리 먹고살려고 다니는 회사라지만 너무 많이, 지나치게 잘 먹었다. 오죽 잘 먹었으면 6개월 만에 2킬로가 쪘을까. 양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그보다 더 찐 거 같기도 한데. 아무튼, 입사 초기만 해도 품이 넉넉하던 바지가 만기 상환을 재촉하는 고리대금업자처럼 빡빡하게 굴기 시작했으니까. 빨대 빨아 당기듯 훕! 갈비뼈가 홀쭉해지도록 숨을 들이마셔야 겨우 지퍼가 올라가고 단추가 채워지다니.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화장실 세면대 거울 속에서 마주치던 얼굴은 또 어떻고. 왠 허옇고 반질반질한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다. 잘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그 때깔의 표본이 여기 있네. 보름달이 된 게 마음이 편한 탓인가. 잘 먹여준 덕분인가. 아마, 둘 다이지 싶다.
호텔에서 근무하던 시절, 영양사님과 경력직 조리사님들이 만들어준 균형 잡힌 식단을 공짜로 먹을 수 있었다. 치솟는 외식 물가를 감안했을 때, 이런 어마 무시한 이점에도 그다지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다 스트레스 탓이었을 거다. 모래알처럼 까끌까끌하게 입안을 맴돌던 밥알과 겨우겨우 씹어서 잘게 부수어진 반찬이 목구멍을 순조롭게 넘어가 주지 않던 때니까. 빨래 쥐어짜듯 위장이 꼬이거나 속이 쓰려서 식판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을 때가 잦았다. 위대(胃大)한 먹성을 자랑하던 먹순이가 말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고, 내 위장도 그랬나 보다. 소화불량을 유발하던 전 직장보다 살만하다고 느꼈는지, 이곳에서는 먹는 족족 부지런하게 소화시키는 위력(胃力)을 보여줬다. 성장기 청소년으로 돌아간 것도 아닌데, 불혹의 위장에 이만큼의 양이 가당키는 한가 죄책감이 들 정도다. 무모한 위력(胃力)의 배후에는 바로 우리 회사 대장금이 있었다. 장금이는 우리 회사의 주방을 책임지는 직원이었다. 책임진다는 것은 임직원들의 점심 식사와 간식, 그 밖의 주방에서 이뤄지는 모든 잡무들이 다 그녀의 몫이란 얘기다. 그녀는 저 멀리 베트남에서 제주로 시집온 결혼이주 여성이었다. 한국인으로 귀화했으니 그녀의 영민한 눈동자만큼이나 야무지고 세련된 한국 이름을 가졌지만, 이 글에서만큼은 우리 회사 대장금으로 부르련다. 그녀의 요리 솜씨로 보자면 마땅히 그럴만하니까 이에 토를 달 직원들은 없을 거라 믿고.
장금이의 요리 스펙트럼은 장담컨대,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보유한 나의 친정 엄마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시집살이를 하면서 익힌 제주 토속 음식들의 가짓수까지 더한다면, 훨씬 능가할지도 몰랐다. 맛은 또 어떻고. 반찬과 국의 간은 항상 과함이나 모자람 없이 딱 적당했고, 자꾸만 먹고 싶게 감칠맛이 돌아서 기어코 밥을 리필하게 만들었다. 포만감이 식도까지 차오르더라도 만족을 그칠 줄 모르는 혀를 달래느라 젓가락을 놓을 수가 없는 맛. 연고 없는 지역에서 아무런 정보 없이 들어가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 기사식당이라 하지 않던가. 장금이는 기사식당 아니, 내 기준으로 한식뷔페 조리장급의 요리 실력을 갖추었다.
베트남인인 그녀가 한식에 통달하게 된 데는 나름의 서사가 있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농사일을 하다가 분가해서 살게 된 집이 지금의 회사 건물 꼭대기 층이었던 거다. 세입자와 건물주로 맺어진 인연이 직원과 대표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입사한 그녀에게 한식을 가르친 사수는 5성급 호텔 주방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이었고, 장금이는 그 밑에서 부지런히 배웠다고 했다. 불같은 성정을 지닌 사수에게 혼이 날까 무서웠을 테고, 말 안 통하는 타국에서 시집살이로 터득한 눈치와 타고난 센스로 배우는 것마다 제 것인 양 흡수했을 터였다. 한국인 누구에게나 친숙하고 입맛 당기는 한식 레시피를 사사한 그녀는 스승이 떠나고 직원식당에 혼자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의 간을 추적해서 비슷한 맛을 재현하는 청출어람의 지경까지 올랐다.
닭볶음탕, 감자탕, 수육, 무생채, 비름나물, 방풍나물, 취나물, 유채나물, 고사리, 그 밖의 각종 계절 나물을 넣은 비빔밥, 어묵볶음, 멸치볶음, 고등어찜, 꽁치찜, 묵은지 김치찌개, 토란국, 오이냉국, 오징어감잣국, 낙지덮밥, 성게미역국, 겉절이, 생선구이 등등 당장 기억나는 것만 나열해도 숨이 차다.
그중 그녀가 애정하는 음식은 한국 사람도 손이 많이 가서 특별한 날에만 만들어 먹거나, 사 먹기를 선택하는 잡채였다. 장금이는 잡채를 가장 좋아했고, 잡채를 제일 잘했다. 따로 볶은 돼지고기, 당근, 양파, 피망, 느타리버섯, 부추, 시금치를 삶은 당면과 합체시켜 오물조물 버무리고 검지와 엄지로 한 꼬집 집어 후루룩 간을 보는 그녀의 얼굴은 룰루랄라 신나 보이기도 했다. 지나가는 언니들을 붙잡고 한 입 먹어보라고 입에 넣어주는 어린 그녀에게서 친정 엄마 같은 푸근함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거다.
호텔 직원식당 영양사님처럼 탄단지의 균형을 일부러 고려해서 체계적인 식단을 짜진 않았지만, 그녀가 차려낸 한정식은 이미 영양학적으로 구색 갖추기가 흠잡을 데 없었다. 밥, 국, 제철 나물, 고기 또는 생선, 볶음류, 무침류, 김치 그리고 후식으로 과일까지. 대표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의 식단가를 유지하면서 매일 다른 메뉴를 주 5일 차려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보고 월급을 따블로 준대도 불가능할 거 같다. (따따블은 생각 좀 해보고... 일단 요리 학원부터 알아봐야...)
장금이는 무엇보다 손이 빨랐다. 요리의 모든 과정이 손끝에 새겨진 듯 헛손질은 없었다. 간혹 너무 빠른 칼질에 베인 손으로 방수밴드를 가지러 사무실에 들르곤 했는데, 직원들 밥때를 늦추지 않으려고 서두르다가 다친 것만 같아서 그 수고로움이 애틋했다.
대표님도 그녀가 차리는 밥상에 자부심이 커 보였다. 오전에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꼭 점심까지 먹고 가라고 붙잡았으니까. 수저 한 벌만 더 놓으면 그뿐이라며, 원형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그 시간을 참 좋아라 하셨다. 직원들의 얘기를 듣다가 자연스럽게 본인을 중심으로 화제를 전환시키는 능력이 어찌나 탁월한지, 모든 이야기의 끝무렵에는 주인공이 대표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럴 땐 응집된 사회생활의 노하우가 빛을 발한다. 눈은 존경을 담아 대표님을 바라보고, 귀는 닫고, 입은 부지런히 씹는다. 혀 속의 모든 미뢰를 총동원하여 한 숟갈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고마운 한 끼를 음미하면서.
대표님이 읊으시는 사업에 대한 자부심, 열정과 노하우를 경청하는 척(?) 하면서도 밥이 꿀떡꿀떡 잘도 넘어간다는 건 진정으로 내 마음이 편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목구멍에 기름칠을 한 거 마냥 씹어 삼키니 위대(胃大) 해지는 건 시간문제일 수밖에. 오동통하게 살이 오르자 입 안쪽 볼살을 같이 씹는 일도 왕왕 발생했다. 쇠맛으로 피가 났음을 감지하고서도 저작 운동을 멈추지 않는 대식가의 면모를 드러내며 열심히, 맛있게 먹던 시절이었다.
이곳에서 근무한 기간을 계절처럼 구분 지어 본다면, 나는 장금이가 있던 때와 없던 때로 나누고 싶다. 그야말로 호시절이었다. 먹고살려고 다니는 회사라고들 하지만 순도 높은 의미로 먹기 위해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밥값 못지않은 성실한 노동이 뒤따랐다. 그녀의 음식은 성실한 노동을 지속하기 위한 땔감이자 연료였고, 그녀의 손 맛은 회사 다닐 맛이 나게 했다.
언니, 오늘 점심은 나가서 먹지 마.
수육이야.
오늘은 언니 좋아하는 거야.
비빔밥.
언니, 힘내라고 좋아하는 거 했어.
닭볶음탕.
장금아, 네가 해준 음식 중에 내가 안 좋아하는 게 어디 있겠니.
푸석해진 얼굴로 커피머신 앞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이 채워지기를 기다릴 때, 모두를 위한 특식을 나만을 위한 별식인 거처럼 말해주면 없던 호랑이 기운이 솟아났다. 무엇이 나올지 미리 알 수 없던 날에는 사무실 창을 통해 풍기는 음식 냄새만으로 관심법을 쓰는 궁예처럼 메뉴를 알아맞히는 재미가 쏠쏠했다. 모니터 속 시계가 12시 정각을 알릴 땐, 매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여고생처럼 설렘을 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었고. 게다가 그녀가 차려준 한식 밥상을 마주하면서 평생 모르고 살던 생소한 습관도 발견했으니, 글쎄 얼마나 좋았으면 먹을 때 어깨를 들썩이며 콧노래를 다 부르더라. 직장에서 어깨춤을 출 수 있다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 줬네. 이게 다 장금이, 네 덕분이야.
그때는 장금이의 밥상이 영원한 줄로만 착각했다. 2년 만에 끝나버릴 줄을 모르고. 음식 사진 한 장 제대로 남길 생각을 못한 과거의 나에게 매콤한 꿀밤을 먹이고 싶다.
장금이는 이따금씩 얼굴에 드리웠던 괴로운 그늘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림자가 닿지 않는 곳에서 행복이 움트게 하려고 아이와 단둘이 제주를 떠나버렸다. 어리석게도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있고 끝이 있다는 진리를 잠시 잊고 지냈다. 친정 엄마가 해주신 집밥 같은 회삿밥으로 훈훈하게 마음을 데워주던 너에게, 나는 어떤 언니였을까. 그저 답답한 속내를 고개 끄덕이며 들어주고 맞장구 쳐줄 수밖에 없었던 내가 힘이 되긴 했을까. 이렇게 이별이 덜컥 닥칠 줄 알았다면 좀 더 자주 말해줄걸.
난 네가 있어서 여기가 너무 좋았어.
그동안 말했던 거보다 몇 배는 더 고마웠어.
이제 행복만 했으면 좋겠다.
행복해라. 제발,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