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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에서 듣는 헛소리 ASMR

셀프 처방전, 그 두 번째

by 뵤뵤리나 Feb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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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원래 속했던 곳에서 나날이 멀어져 갔다.
나날이 낯설어져 갔다.
나날이 가벼워져 갔다.

아무튼, 하루키
-이지수-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곳의 멍에를 하루아침에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지만 인생의 모든 시련이 그렇듯, '시간이 약'이라는 전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시간이란 녀석은 통장 속에 월급이 스쳐 지나가듯 있다가도 없는 것처럼 무신경하게 굴어줘야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았다. 무진장 바쁘거나, 무진장 몸이 고되거나, 이 두 가지 요건이 성립되어야 우울에 잠식당하지 않고 살아질 거 같은데. 일자리의 상실은 주 5일, 9 to 6의 규칙적인 루틴도 상실함을 의미했다. 두뇌에서는 빨리 일어나라고 전신의 모든 감각에게 소리쳤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띠리리, 탁-   

오늘 아침도 그랬다. 남편과 아이는 부지런히 아침을 챙겨 먹고 나갔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상의 몫을 감당하러. 그간의 마음고생을 알았던 남편은 당분간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라고 했지만 마음 편히 그러지도 못했다. 인생 태만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우울함을 증폭시켰다. 일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누가 등에 강력접착제를 발랐나. 꼼지락거리며 한 팔을 협탁으로 뻗어 휴대폰 화면을 켜고 유튜브 아이콘을 눌렀다. 영상이 주는 단순 쾌락으로 현생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어볼까. 폰 화면을 위아래로 쓰다듬다가 한 영상에서 바쁘던 검지를 멈추었다. 어디였는지 이름은 기억나진 않지만 장면만은 또렷한, 눈부신 자연을 여행하는 브이로그. 건강하고 싱그러운 일상을 살아가던 과거의 내가 알고리즘에 뿌려놓은 씨앗이었다.




군산오름에서군산오름에서



'좋겠다, 부러워.'

내 몸을 영상 속 저 자연 앞에 데려다 놓고 싶어졌다. 문득 예전에 혼자 용기 내서 가보고 매료되었던 오름이 떠올랐다. 제주 오름 368개 중 가장 아름다워서 "오름의 여왕"으로 불린다는 따라비 오름. 처음 다녀온 날, 그 충만했던 산뜻함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 암막 커튼을 열어젖히니 고맙게도 날이 맑다. 잔뜩 물을 머금고 늘어진 스펀지처럼 무거웠던 몸을 일으켰다. 주섬주섬 옷과 모자를 걸치고 서둘러 차로 내려가 시동을 걸었다. 나태지옥의 저승사자가 다시 침대로 가두기 위해 뒤에서 쫓아올 것만 같아 두려웠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기대했던 것보다 구름이 많았지만 그마저도 괜찮았다. 삶의 방향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아쉬움보다는 지금 여기, 발 딛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브런치 글 이미지 3




 따라비 오름은 입구에 깔린 야자 매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편은 가파른 오름 정상 방향, 오른편은 둘레길 방향. 오늘은 가보지 않은 길로만 구석구석 다녀 보자고 마음먹었다. 정상을 빨리 딛고 싶어서 초행길에 선택했던 오름 방향은 이제 더는 궁금하지가 않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고 해도, 망설임 없이 둘레길로 들어섰다.


양쪽 뺨을 스치는 싸늘한 바람이 신산스러웠다. 선택은 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과 후회를 동반한다. 떡을 양손에 쥐고 모두 맛보는 호사는 인생 2회 차나 회귀물 장르의 웹툰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니까. 절박한 마음으로 선택했던, 제주에서 다닌 두 번째 직장은 결국 상처로만 남았다.  


 그렇게까지 아둔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그곳에서 나는 석상처럼 얼어붙었던 것일까. 거절해야 할 때 거절하지 못하고, 싫은 말을 듣고도 저항하지 못하고. 잘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긴장을 불렀고, 그 긴장으로 말미암아 일을 그르쳤으니 심한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닐까.


 '아니,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좁은 둘레길에서 곁을 스쳐가는 오름 등반객이 의아하게 볼 거라는 의식도 못한 채,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으며 끈덕지게 달라붙은 자책을 털어냈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대책 없는 행복을 어서 맞이하고 싶다.

가팔라진 경삿길을 간절한 염원을 담은 발자국으로 꾹꾹 눌러가며 올랐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드디어 정상이다. 따라비 오름의 매력은 360도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각기 다른 장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경관에 빈틈없이 둘러싸이다 보면,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한낱 인간의 근심과 고민은 조촐해지기 마련이다.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익숙한 번호다.

다.

......

평온하게 잠재웠던 심장 박동이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노여움이 타다 남은 불꽃처럼 여태 가시질 않았나 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이별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가스라이팅에 실패하고 본인의 통제권을 벗어난 직원을 호락호락하게 보내줄 위인이 아니었다. 나 또한 성인군자는 아니므로 끝까지 순종적이지는 못한 직원이었다. 마음속 앙금을 감추고 아름다운 뒷모습만 남기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인내심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퇴사 후 매듭짓지 못한 문제가 남아 있었기에 피할 수 없는 전화였다.


심호흡을 내쉬고, 마른침을 꼴깍 삼키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려웠다. 그의 화기에 덴 상처는 아직 딱지도 앉질 않았는데. 아주 오랫동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비참함이다.


대략 서두를 들어보니 1, 2분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말없이 오른귀에 붙이고 있던 휴대폰을 떼어내 왼손으로 스피커를 막았다. 그리고는 저 멀리 눈앞에 바다와 오름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당신은 떠드세요.
제가 아니라 허공에다가요.  



헛소리니까 바람결에 무심히 흘려보내는 게 맞겠지요.

그리고 당신도 들어보세요. 제주의 바람 소리를.

세상이 온통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린 한낱 미물일 뿐이에요.


스피커를 뚫고 어렴풋이 흘러나오는 소리로 유추해 보자면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네가 이딴 식으로 그만두냐는 요지인 듯했다. 그리고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는 저주와 악담의 기운도 느껴졌다. 요즘 휴대폰 성능이 좋아서인지 안 듣고 싶어도 들렸고, 들었는데도 안 들렸다.      


이로써 명료해졌다. 그가 행했던 말들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사실이. 폭언과 비난에는 나를 위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붙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이용해 먹기 위함을 곱게 포장한 것뿐이었다.   


당신이 남긴 상처에 소금을 갖다 붓는 걸 멈추기 위해서라도 이제 원하는 대답을 해드려야겠지요. 상호 존중이어야 할 사이가 상호 좀먹는 관계로 발전하기 전에, 상대적 약자인 내가 그냥 참을게요. 그러니 제발 더 이상 질척거리지 말고 헤어져요. 우리.  


한라산과 제주 바람에 부대끼는 억새들




거친 바닷바람이 찰지게 후려쳐도 부러지지 않는 억새처럼,


구름이 표표히 곁을 스치든 말든 소란 없이 고요하게 인간사를 관조하는 한라산처럼,


당신이란 사람이 더 이상 저에게 정서적 타격을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어요.







 길었던 일방적인 통화를 끊고 나자, 벌써 둘레길의 내리막길에 다다랐다. 따라비오름 정상에는 큰 원형 분화구(굼부리)가 있고, 한가운데에는 3개의 작은 분화구가 있다. 그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으면서 꾸깃꾸깃 접힌 채 구석에 버려졌던 용기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 탓이 큰 지, 네 탓이 큰 지 따지고 드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이제 그만 멈추고 현실을 똑바로 볼 용기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 아무런 사고도 없었던 것처럼 새하얀 도화지로 덮어놓을 순 없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과거에 붙잡힌 발목부터 풀어줘야 하겠지. 내 인생에 같은 오류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무엇을 해야 하지?







자, 이제 사색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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