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라고 고쳐 쓰는 일

by 로움

오후 네 시 사십 분. 창틀을 넘어온 볕이 거실 테이블 위에 비스듬히 몸을 눕힌다.

공기청정기가 이따금 낮게 웅얼거릴 뿐, 집안은 물속처럼 고요하다.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병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차갑고 선명한 감각.

현재의 좌표는 2026년 3월 17일 오후 4시 40분.

지금, 나는 정확히 이 좌표에 머물고 있는가.

나의 의식이 머무는 곳을 헤아려본다.

의식은 번번이 중력을 벗어났다.

시간이 지나간 발자국 위를 고집스럽게 맴돌거나,

아직 인쇄되지 않은 달력의 빈칸으로 성급히 마중을 나가버리곤 했다.

정작 지금 당도해 있는 이 좌표의 밀도를 감당하지 못한 채 서성이는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달력을 자주 넘겨보는 습관이 있다.

빨간 동그라미를 쳐둔 어느 먼 날,

아직 배달되지 않은 우편물 같은 내일들을 기다렸다.

거창한 무대, 구김 없이 다려진 셔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완벽한 영감의 순간.

그것들에 '꿈'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둔 채 오늘을 끝없이 유예했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햇빛 속에 떠다니는 먼지들을 본다.

아주 느리고 무작위적인 춤.

문득 서늘한 기시감이 목덜미를 스친다.

넓은 창, 비스듬한 볕.

아무도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고,

누구의 허락도 청할 필요 없는 고유한 나의 시간.

이 무심하고 고요한 오후를,

내가 오래도록 꿈꿔왔던 바로 그날이라고 명명해 본다.

일기장 첫 장에 적어둔 가상의 날짜 위로 검은 잉크를 덧칠해 오늘 날짜로 바꾼다.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식탁 위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은 오직,

지금 나의 체온을 머금고 미지근해져 가는

이 투명한 물병 하나.

나는 물병을 내려놓고, 좌표 위에 점 하나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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