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영토

by 로움

매끄러운 세계다.

AI에이전트는 피로를 모르고,

무수한 알고리즘은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내일을 연산한다.

증명할 필요 없이 답이 쏟아지는 스크린 앞에서,

한때 인간의 고유함이라 믿었던 지성은 조용히 기화(氣化)하고 있다.

고통도, 지연도 없는 투명한 효율의 바다.


하지만 전원을 끄는 순간, 비로소 육체가 비명을 지른다.

오래 앉아 있어 뻐근해진 요추의 통각,

찻잔을 쥐었을 때 전해지는 델 듯한 열기,

그리고 적막한 방 안을 채우는 나의 불규칙한 숨소리.

이것들은 데이터로 치환되지 않는다.

AI가 수집하는 심박수와 체온은 수치일 뿐,

그 박동 뒤에 숨은 그리움의 농도나 식은땀에 섞인 수치심까지 복제할 수는 없다.


몸은 기록 장치가 아니라 서사체다.

무릎의 흉터에는 어린 시절의 골목길이 고여 있고,

눈가에 잡힌 잔주름에는 수십 년간 웃고 울었던 바람의 결이 박혀 있다.

포옹할 때 훅 끼치는 타인의 체취, 머뭇거리는 손끝, 기어코 엎지르고 마는 물컵.

기계가 닿을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영토는 불완전함의 균열 속에 있다.


우리는 더 섬세하게 감각해야 한다.

매끄러운 스크린을 미끄러지는 시선 대신, 거친 나무껍질을 만지는 손길을 회복해야 한다.

사랑은 텍스트가 아니라 엉겨 붙는 땀방울과 귓가를 간지럽히는 뜨거운 날숨으로 증명된다.


지식의 시대가 가고 감각의 시대가 온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몸을 떠나 살 수 없었음을 이제야 사무치게 자각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기계가 생각할 때, 나는 걷는다. 기계가 판단할 때, 나는 아파한다.

그리하여 이 서늘한 금속의 시대에, 나는 기꺼이 나의 낡고 부서지기 쉬운 살(肉)을 끌어안는다.


살아있음의 유일한 증거는, 오직 이 살갗의 떨림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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