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새어머니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을 텐데 나도 있다.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간단히 적는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12살에 집을 떠나셨다.
내가 너무 어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가정은 싸움이 잦았다.
부부싸움 소리는 어린 나와 형제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우리의 공포보다는 자신들의 자존심이 더 중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사실 조용한 분이셨고 사람 좋기로 유명하셨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했다. 심지어 울 때에도 '아빠'라고 부르며 울었다.
아버지에게 한글도 배웠고 뭐든 잘 못하는 나를 유일하게 아껴준 가족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부재가 힘들었어도 떠나실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은 그냥 헤아릴 수 있었다.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고 고등학교 때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아버지와 같이 살자는 전화였다. 나는 사실 두려웠다.
이기적일 수 있지만 아버지가 나를 보살필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었다.
그래서 거절했었다.
이후로도 그 통화가 내내 미안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결혼할 무렵 나는 다시 아버지께 연락을 했다.
아버지와 다시 연결된 것은 내가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의 어머니는 내 결혼을 무척 반대했었다. 심한 갈등 끝에 나는 친어머니와 연을 끊고서야 결혼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다행인 건지 친어머니의 눈치를 보지 않고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미 재혼한 상태였다.
재혼한 분이 나의 글에 등장하는 어머니다. 사실은 새어머니가 맞지만 그냥 어머니라고 부른다.
나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어머니와 잘 친해지지 못했다.
20여 년이 지나도록 속 깊은 대화는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친정에 가면 아이들에게 잘 대해주셨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20여 년 전부터 제주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사셨다.
농사는 참 힘든 일임에도 아버지는 자연에서 살고 싶어 하셨다.
사람들에게 치이는 서울을 떠나 내려가셨던 것 같다.
반면 새어머니는 밝고 무던한 분이시다. 항상 '농사는 할게 못된다, 농부한테 시집가면 안 된다' 하시면서도 아버지의 귀농에도 찬성했었고 고집스러움도 다 받아주셨다. 동네에서 수완 좋기로 유명하여 내성적인 아버지에게는 보완적인 짝이었다.
무엇보다 아버지를 존경하셨다.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는 본인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하신 모양이셨는지 나에게 어머니가 천사라는 말을 하셨다. 긴 대화는 아니었지만 아버지에게 그분은 좋은 분이었다는 말이다. 지나고 보니 그건 남겨진 반려자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리는 끝 모를 소송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