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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Aug 21. 2023

어느새 길을 잃고 또 잃어버린다

「아마도 악마가」, 1977


그동안 봐왔던 여러 작품 중, 이 영화가 제일 막막했다. 물론, 사회에 대해 우울한 분위기를 가진 영화들을 안 본 건 아니지만, 이 영화만큼은 너무나도 형용할 수 없었다. 도저히 나아갈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어떤 말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암울하다도, 절망스럽다도 맞는 단어가 되지 못할 것 같다. 그저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속에 담긴 감정들에 감탄할 뿐이다.


작품에 대해서 깊게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영화를 다시 그리고 그리다 보면 왠지 모르게 나도 함께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절망에 갇혀버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얘기를 꺼내는 게 쉽지가 않아, 생각을 조금 바꿔본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에선 어떤 게 보이는가. 왜 그의 영화는 나에게 자꾸만 심해 같은 의문을 안겨주는가.


그의 영화 두 편을 보며 느끼게 된 건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조에서도 쉽게 알아차릴 수 없고, 표정 또한 쉽게 무언가를 느낄 수 없다. 그렇기에 인물들의 말들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그 말들로 상황을 그려보고, 어느새인가 내가 영화 속에 존재하게 된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는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보일 뿐이다. <아마도 악마가>에서도,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공간도, 인물도. 가공되지 않았고, 인물들이 떠나간 자리를 길게 보여주며 공간을 인식시킨다. 이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그의 영화를 각인시켜 준다.


주인공은 사는 것보다 죽음에 마음을 더 두고 있다. 죽어서야 알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혼란스러운 사회, 이리저리 어떻게든 마주치고 맞춰보려는 시도를 하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럴 때는 그 사회에서, 그리고 모든 사회에서 벗어나 모든 걸 읽어보는 것이. 이것이 죽음의 의미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죽음을 맞이하고 나서야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세상이라니. 아무것도 정립되지 못했다니.


결국 주인공은 죽음을 맞이한다. 스스로의 힘은 아니었다. 마약중독자 친구의 힘을 빌렸으며, 죽음을 부탁하는 과정도 나는 왠지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에게 남은 돈을 모두 털어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 목숨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거래가, 혼란스러운 사회를 대변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더 좌절스럽다. 결국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주인공은 답을 찾아내지 못했고, 가장 벗어나고 싶었을 방법으로 최후를 택한 것 같아서.


물론 이 영화가 절망과 좌절로 모두 채워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며 이러한 감정들로 점차 채워져서 그럴 수도 있다. 누구는 결말부를 최선의 선택이라 할 수도 있으니.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는 담담하게 모든 걸 전해준다. 다시 이 영화를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나의 감정이 어떤 걸로 채워질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202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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