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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틀 만에 불어온 바람

더위를 식히는 건 바람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by byspirit

매년 여름이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낮 동안의 더위는 참고 넘길 수 있었지만, 한밤의 열기 앞에서는 온 가족이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세 아이와 함께한 지난 여름, 39도를 웃도는 날씨였다. 말 그대로 폭염의 연속이었다. 뜨거운 공기를 휘젓는 선풍기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더 짜증을 부추겼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삼남매는 새벽까지 뒤척이고 말았다. "이번 여름엔 에어컨을 꼭 들이자"고.


몇 해를 그렇게 말로만 넘기다, 마침내 실천에 옮겼다. 지인의 소개로 10년 된 중고 휘센 에어컨을 65만 원에 구입했다. 다소 낡았지만, 작동만 잘 되면 충분하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이 일은 단순한 가전제품 하나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첫 설치 기사는 실외기 호스가 짧다는 이유로 실외기만 가져갔고, "이틀 뒤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실외기는 고장이 나 있었다. 2주 뒤에 찾아온 기사는 본드 스프레이 하나로 모든 문제를 덮으려 했다. 결국,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장 난 에어컨만 덩그러니 남았고, 나는 베란다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중고 에어컨보다 사람에게 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지금 당장 전화해서 따져? 아니야, 그래도 참자. 그러다 소개 해준 분이 머쓱해지면 어떡하지?" 그 순간, 천사와 악마가 전두엽 어딘가 동시에 주둔하며 짧지만 치열한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복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넘어가지 말걸, 왜 바보같이 괜찮다고 말했을까."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평소 같으면 입 밖에 꺼낼 리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나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날 강도도 이런 날 강도가 없지", 마음이 무너졌다는 표현이 이럴 때 쓰이는 거구나 싶었다. 돈을 잃은 게 아쉬운 게 아니었다.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돌아온 배신이 더 아팠다. 누군가를 믿었다가 다치고 나면, 세상이 괜히 더 낯설어지는 법이니까.


유난히 맑은 날이었는데도, 하루가 잿빛 같았다. 머릿속은 멍했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은 빠져나갔다. 벽에 붙은 고장 난 에어컨을 멍하니 바라보며, 내가 기대한 건 에어컨이 작동 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무책임함과 파열음이 내 마을을 파고들었다. 평소라면 입 밖에 꺼내지 않을 말을 중얼거리며, 무너진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있었다. 돈보다 더 아까운 건, 무너진 신뢰였다고. 그리고 더위보다 더 숨 막히는 건 바로, 믿음이 깨진 관계의 온도였다. 결국, 일어난 상황은 수습하지 못하고 허탈한 마음이었다.


그즈음, 차량 검진을 받으러 갔다. 8년째 알고 지내던 거산모터스 사장님께 에어컨 구입을 알아보려고 속상한 마음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러자 1분도 망설임 없이 "있어봐유, 동창이 천안에서 에어컨 판매하고 수리하는디... 연락해 볼게유." 사장님은 지인을 소개해주셨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다고. 말씀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이후의 전개는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행됐다.


천안에서 한걸음 달려와 만난 삼성에어컨 설치 기사님은 처음부터 남달랐다. 집 구조를 꼼꼼히 살피고,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실용적인 방법을 제안해 주었다. 설명은 명확했고, 작업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사모님, 여기 뒤쪽을 보시면, 필터 청소할 때 한 번 눌러서 꺼내면 됩니다." 그는 나를 단순한 고객이 아닌, 친인척 동생처럼 대했다.


"요즘 당근마켓 중고 거래로 소상공인들이 피해를 많이 보더라구요. 특히, 에어컨 실외기도 고장난 상태에서 판매하다 보니 일반 소비자들은 알 수 없죠"


에어컨 설치 이후 실외기 거치대는 추가 비용 없이 설치해 주었다. 에어컨 작동 방법과 연장선도 새로 구입해서 꽂아 주었다. 무엇보다 기사님의 온기 넘치는 말과 배려 깊은 태도, 작업의 손길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음성지원 기능이 있는 1등급 중고 제품이었지만 상태는 거의 새것 같았다. 삼성 무풍 에어컨이라 좋았다. 설치는 신속했고, 처리 과정은 빈틈없었다. 단 이틀 만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 리모컨을 건네받고 더위를 식히는 기능을 넘어서, 삼남매가 선풍기 앞에서 숨이 턱 막히던 날들을 떠올리니,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울컥했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실외기 거치대가 떨어지면 연락 주세요. 제가 다시 설치해 드릴게요."라는 말과 함께 건네준 따뜻한 배려였다.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한여름이 찾아오기 전에 에어컨을 설치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라는 미소와 진심 담은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뜨거워진 눈가를 애써 외면하며, 꾹 눌러 삼켰다. 울컥하는 마음이 자꾸만 올라와서, 괜히 물 잔을 한 번 더 들었다.


이번 여름, 이 작은 사건은 단순히 중고 에어컨을 사고 실패하고, 다시 좋은 걸 얻었다는 소비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보다 더 깊은 결을 남긴 건,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고장 난 에어컨으로 시작된 이 소동은 결국, 사람에 대한 믿음을 다시, 되찾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흔히 기계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해주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이다. 에어컨은 바람 없이 조용한 시원함을 준다고 하지만, 이번에 내가 받은 진짜 시원함은, 이유를 묻지 않는 다정함, 조건 없는 배려에서 온 것이었다. 그건 무풍이 아니라 무심하지 않은 마음에서 온 바람이었다.


8년 만에 에어컨을 들였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가전일지 몰라도, 내게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그리고 친절한 사장님의 배려와 온기를, 나는 이 여름이 다 가고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올여름은 그래서, 조금 특별하다. 바람보다 먼저 도착한 건, 한 사람의 진심이 담긴 다정한 마음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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