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만 해도, 길만 나서면 낯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머물곤 했다. 어쩌다 교육에 참석할때면 초면인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꼭 한 번씩 나이를 물었다. 전형적인 아줌마들의 루틴이라고 해야 할까? 40대 후반이었지만, 조별로 앉아 있으면 “혹시 서른 초반이에요?”,겉으로는 손사래를 치며“아유, 저 그렇게 젊지 않아요. 먹을 만큼 먹었씨유~(웃음). 마흔네 살이에요.” 하면서도 속으로는 괜히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 더 고개를 돌려볼 만큼, 나는 예뻤으니까.
또 어떤 날은 마트에서 처음 마주친 이모도 그랬다. “손님, 이런 말 무례하겠지만… 너무 예쁘세요.” 그 말 한마디가 괜히 기분 좋았다. ‘내 인상이 좋다는 뜻이겠지’ 하며, 스스로에게 자존감 뿜뿜으로 웃어주던 시간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 가족력도 없는 내가 암환자가 되었다. 살은 확 찌고, 지나가는 길에서 마주쳐도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유방암 판정을 받고, 수술에 이어 항암치료를 시작했던 과정의 후유증이니까. 방사선치료는 무려 20회. 그 모든 과정이 내 몸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암투병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너스레를 떨며 물었다. “어머, 왜 이렇게 살쪘어요? 출산하셨어요?” 그땐 그런 말들이 상처였다. 웃어넘기지 못했다. 농담이라고 하기에 내 마음엔 그럴 여유가 없었기에. 지금은 그래도 ‘ㅎㅎ’ 웃으며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땐 아니었다.
2년 전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긴 머리카락이 빠지고, 얼굴은 퉁퉁 부었다. 눈 밑엔 시퍼런 멍이 내려앉았고, 손톱과 발톱은 시커멓게 물들었다. 누르기만 해도 쓰라리고, 심장은 따가웠다. 대학병원 복도를 지나 걷는 것조차 버거워진 나는 결국 재입원하게 되었고,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유언장까지 썼다.
‘만약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그 질문 하나로, 나는 작고 조용한 교회를 찾았다. 남은 삶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7년 전 알고 지냈던 집사님은 말했다. “내가 아는 집사도 안수기도를 받고 종양이 사라졌다”면서 기도원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아닌 거 알지만 믿고 싶을 만큼 간절했다. 그래서 가발을 쓰고도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맨 뒷자리에 앉았다. 혹시라도 어르신이 “교회에서 모자를 써?”라고 할 까봐… 혼자 별의별 걱정을 다 했다. 젊은 내가 앉기엔 뒷자리는 푹신하고 넓어서 더 눈치가 보였으니까.
그런 나에게, 조용히 다가와 준 분이 있었다. 교회 사모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축복합니다.” 부담스럽지 않게 인사는 정말 따뜻했다. “여기 앉아계시면 편하시죠? 말씀 듣고 점심 드시고 가세요.” 온기 담은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눈물이 핑 돌았다. 잔뜩 굳어 있던 마음을 덜어 주었으니까. 사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인생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단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4차 항암치료까지 받고, 면역력이 바닥일 땐 마스크를 썼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했지만, 앉아 있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1년 넘게 부종으로 고생했고, 매일 매일이 충격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저녁까지 버티는 것도 기적 같았다.
그랬던 내가, 2년 만에 용봉산 정상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생태환경지도사 자격을 취득하고, 바리스타 2급 자격도 따냈다. 지금은 요양보호사 국가자격 과정을 공부 중이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1월 30일에는 당진시립중앙도서관에서 출연 연락을 받았다. 이어 KBS 아침마당에 출연했고, 7월 5일에는 MBC 다큐멘터리 내포문화숲길 촬영도 진행했다. 그 어느 때보다 다채로운 시간을 보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내가 혼자 해낸 건 아니었다. 말로 다 전할 순 없지만,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준 이들이 주변에 있었다. 이름을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매일 안부를 물어주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따뜻한 밥 한 끼를 챙겨주었다. 또 누군가는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고, 어떤 이들은 짧은 메시지 하나로 하루를 붙잡아 주었다. 그렇게 수많은 마음들이 부서질 것 같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렇게 숨 쉬고, 다시 배우고, 걸어 다니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모두 그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마와 싸우면서 끝까지 혼자 견뎌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늘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다. 그 손길 위에서 나는 지금도 건강하게 지낸다. 현재까지도 오마이뉴스 기자로, 당진신문 시민기자로 살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한 번씩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7월 10일 목요일, 새벽 6시에 출발해서 7시 반에 도착했다. 단국대병원에서 6시간 동안 검사를 받았다. PET CT, MRI, X-ray… 방사능 2m 주사를 맞고, 어디에 전이됐는지 확인해야 하는 검사였다. 1년마다 받는 정기검진이지만, 보이지 않는 두려움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잘 살아내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7월 10일 검사 결과는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충격이었다. 교수님의 눈빛이 어두웠다. 차분하게 말씀을 이어가면서“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을까요?, 12월에 뼈 스캔 검사를 해보고 정확히 말씀드릴게요.” 앞이 깜깜했다. “교수님, 곧 복직을 앞두고 있는데 괜찮을까요?” 한참을 침묵하시다 “네.괜찮습니다. 그런데… 우측 뇌 측면에 뭔가 보이는데 한 번더 검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뇌전이 의심이었다.
11월이면 복직인데, 12월부터 다시 입원하게 되면 어쩌지? 또다시 수술대 위에 누워야 할까. 다시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빠질까. 병원 복도를 걸어 나오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년 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수술에 이어 항암치료, 방사선치료까지 받았는데. 그 고된 과정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면…이번에는 솔직히,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엇보다 힘들게 기른 머리카락을 또 밀고 민머리로 다시 병원에서 누워 있어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러다 삼남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끝까지 다 받자.’ ‘그리고… 안 되면, 그땐 순리에 따르자. 뭐 어찌하겠는가…’
이 두 가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간다. 한쪽에선 다른 치료 방법이 있을까?, 또 한쪽에선 살아내려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6개월 뒤, 작은 기적이 내게 다시 찾아오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