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이후의 삶, 멈춤이 아닌 전환이었다
은퇴 이후의 느린 기록, 김보성 작가가 말하는 기다림과 삶의 태도
지난 1월 31일, 충남 당진시 신평면 작은 책방 ‘한선예꿈꾸는 이야기’에서 김보성 작가의 강연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서점 안은 잠시 차분한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사진과 글,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요양병원 원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김 작가는 "책만 읽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한때의 바람을 삶의 방향으로 바꿔온 사람이다. 이날 강연의 제목처럼 <충분히 어두워야 별을 본다, 내 삶도 그렇다>였다.
김 작가는 오랜 시간 노인 돌봄의 현장을 지켜온 사람이다. 사회복지법인 노인복지센터에서 요양원 원장을 맡아 재가센터의 주간보호와 방문요양 현장까지 두루 책임지며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은퇴 전까지 경제 활동에 전념해 온 그는, 은퇴 이후 전혀 다른 속도의 삶으로 이동했다. 퇴직 이후의 변화는 거창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시작한 사진 촬영과 독서, 그리고 기록이 서서히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풍경이 아니라 시선이었어요."
김 작가의 말처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몇 초의 장면을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피사체 하나를 위해 숨을 죽이고, 작은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게 얻은 사진 한 장에는 장면 너머의 기다림과 집중,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함께 담겼다. 강연은 자연스럽게 사진 이야기로 이어졌다.
황새 한 쌍이 둥지 위에서 날개를 펼치는 순간과 숲 속 가지 위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던 소쩍새의 장면을 꺼내 들며, 그 사진들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텐트를 치고 먹이를 놓은 뒤,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강태공처럼 기다린 끝에 셔터를 눌렀다는 설명이다. 김 작가는 "세상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늘 준비된 기다림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며, 사진을 통해 배운 기다림의 태도가 결국 삶을 대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사진을 찍으며 김 작가의 여행 방식도 달라졌다. 명소를 빠르게 소비하듯 지나치기보다, 한 장면을 얻기 위해 오래 머무는 시간을 선택하게 됐다. 그러자 이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자연의 변화와 생명의 움직임, 그리고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다림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김 작가는 사진을 통해 배웠다. 도전과 다짐들의 기록은 자연스럽게 요양원에서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김 작가는 배지영 작가와 함께 ‘1인 1책 에세이 글쓰기’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요양원의 시간을 떠올렸다. 흔히 ‘시설’이라는 말로 단순화되지만, 그곳은 삶의 감정이 가장 농축된 공간이었다. 보호자의 안도와 죄책감, 종사자의 책임과 소진, 치매 어르신의 혼란과 고요가 한 공간 안에 겹쳐 있었다. 기억은 점점 흐려져도 감정 만큼은 또렷하게 남아 있는 어르신들. 그 삶을 기록하는 일에는 서두르지 않는 시선이 필요했다.
이어 요양원의 삶을 다룰 때 동정이나 과도한 감동은 오히려 삶을 왜곡한다고 말했다. 필요한 것은 끝까지 지켜보는 책임감이라고 했다. 사진을 찍을 때처럼, 판단보다 관찰이 먼저이고 설명보다 기다림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은퇴 이후의 삶은 그에게 기다림을 다시 연습하는 시간이 됐다. 치열한 현장을 떠난 뒤에도 김 작가는 멈추지 않았다. 사진을 찍고, 책을 읽고, 글로 기록하며 삶의 속도를 스스로 조율해 나갔다.
사진과 글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깊이 바라보고 있는가. "충분히 어두워야 별을 본다"는 말은 김 작가에게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요양원의 긴 밤과 숲속의 적막한 대기 같은 시간들을 통과하며 길어 올린, 삶의 문장에 가까웠다. 겹겹이 쌓인 어둠의 시간을 지나왔기에 김 작가는 서두르지 않고, 더 낮은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덜 앞서가고, 더 오래 머무르며, 몸과 마음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는 삶. 그런 선택은 극적인 변화를 약속하지 않지만,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된다고.
은퇴 이후의 삶 또한 김 작가에게는 멈춤이 아닌 전환이었다. 취미와 독서, 그리고 기록을 통해 삶의 기준과 사유의 결을 다시 가다듬는 시간이었다. 모든 순간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로 받아들이려는 김 작가의 다짐은 문장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으로 소소하게 스며들었다. 삶을 대하는 속도와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 그러한 결심이 은퇴 이후의 시간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의 삶 역시 특별하지만 거창하지 않다고 말한다. 어반드로잉으로 하루의 장면을 그리고, 드럼 연주로 아침을 연다. 사실, 마흔 무렵 신장 기능에 이상을 알게 되었고, 쉰여섯에 신장 투석을 시작했다. 이어 쉰여덟에 은퇴했지만, 지금도 투석은 그의 일상 속에 있다. 삶은 여전히 몸의 리듬과 함께 이어지고 있달까.
김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책에는 삶의 속도와 환경,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몸의 운명과 맞닿아 있는지가 담담하게 드러난다. 모두가 더 빠른 방향으로 내달릴 때, 오히려 속도를 낮추는 쪽을 선택했으니까. 강연이 끝난 뒤에도 책방 안에는 한동안 잔잔한 여운이 머물렀다. 사진과 글, 그리고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김 작가의 이야기가 오래 남는 이유는 특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빠른 결론보다 늦은 이해를, 화려한 결과보다 눈앞에 놓인 시간을 호쾌하게 끌어안으면서도 소중히 여기는 태도, 김 작가가 말하는 ‘기록하는 삶’이었다. 강연을 마친 김 작가의 눈빛에는 오랜 기다림을 통과해 비로소 얻게 된, 근엄함 속에 깃든 미소와 함께 단단한 삶의 온기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