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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Dec 01. 2022

현모양처

엄마는 당신의 딸은 다르게 커 주길 바라셨다.

현모양처(賢母良妻) - 어진 어머니, 착한 아내.


첫 브런치 글은 엄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다.


가족은 엄마의 전부다. 학교를 다녀오면 나를 맞아주시는 엄마가 계시는 게 당연했고, 눈을 뜨면 매일 아침 아빠와 우리 두 남매를 위한 막 지은 밥상이 준비되어있었다. 성인이 되며 엄마가 우리에게 준 안정감과 따듯함은 내 정서에 큰 기둥 같은 역할을 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우리 엄마 같은.


"엄마, 나도 엄마처럼 살 거야!"  
“왜.. 넌 네 삶을 살아, 더 멋지게"

엄마는 당신을 닮은 딸만큼은 내조하는 ‘현모양처'가 아닌, 본인의 삶을 멋지게 가꾸고 살아가는 여성으로 커 가길 바라셨다.




엄마는 날 가지셨을 때부터 "민수", 태윤" 같은 중성적인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하셨다. 자라며 내 옷장에는 여자아이의 상징적인 분홍색 옷은 없었고 손에는 인형 대신 로봇이나 레고를 쥐어주셨다. 또래 여자 친구들은 피겨 스케이트를 배울 때 나는 원치않게 홀로 남자 친구들과 스피드 스케이트를 배우던 기억이 난다.


여성성의 틀에 가두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씩씩함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부끄럼 많은 아이였고, 레고보단 인형놀이가 재밌는 천생 여자아이였다. 타고난 성향은 바뀌지 않는지 여전히 친구들이 나를 설명할 때면 "여성스럽다"는 단어가 빠지지 않지만, 엄마는 날 강하게 키우고자 하셨다.




이모와 삼촌들 사이 샌드위치처럼 낀 둘째 딸, 엄마는 늘 순위에서 밀렸다고 한다. 그런 엄마에게 오뚝한 코와 큰 눈, 예쁜 외모는 힘이었다. 맏딸은 첫째라서, 삼촌들은 아들이라서 관심과 기대가 많았던 반면 엄마는 예쁜 외모와 특유의 재잘재잘 사랑스러운 성격만이 어른들의 관심을 받는 방법이었다고 하신다. 꼬마였을 때 "속눈썹이 어쩜 인형같이 올라가 있니?" 란 말을 듣곤 그 칭찬이 좋아 모두 당신의 속눈썹을 볼 수 있도록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는 귀여운 일화처럼 말이다.


외조부모님께 사실 엄마는 큰 걱정거리가 아니셨던 것 같다.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쁘고 똑똑한 둘째는 알아서 대학도 잘 가고 결혼시킬 걱정도 없는 딸이었던 것이다. 같은 자매지만 엄마와 달리 큰 이모는 꾸미는 건 관심도 없었고 예쁘장한 외모도 아니라 외조부모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맏딸은 공부라도 열심히 시켜야겠다 하셨단다. 조부모님이 키가 작은 이모를 두고 "누가 데려가려나.. 당신이 다리를 잡고 내가 머리를 잡고, 늘려봅시다" 하셨던 일화는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난다.


그렇게 엄마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 치과대학에 진학하셨던 이모는 의사 면허증을 따셨다. 엄마는 아빠와 선을 봐 결혼을 하셨고, 이모는 일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엄마는 우리를 키우셨다. 본인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이모를 보며 엄마는 차츰 당신의 삶과 비교되셨던 모양이다.


"엄마는 예쁜 게 최고인 줄 알았어. 외모 믿고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살아보니 여자도 능력이 있어야 해"


자아존중감,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태도라고 한다.

이 자존감은 나이가 들 수록 보여지는 외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걸 서른이 되며 내가 깨닫았듯, 우리 엄마도 내 나이 무렵 느끼셨던 바 아닐까.

엄마는 여전히 소녀처럼 곱고, 크게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계시지만 당신에게는 내가 보지 못하는 순간의 상처와 아쉬움이 남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엄만 내게 예쁘다는 말은 잘 해주시지 않는다. 독이 될 수 있다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치과의사가 되었다.


치과의사의 꿈은 스스로 택했지만 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던 건 부끄럽게도 내 의지보단 부모님의 헌신적 지지가 크다. 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조금 더 쉬운 길을 택할까 흔들렸고 도망갈 궁리를 할 때면 부모님은 나를 혹독하게 다그치시며 몇 번을 오뚝이처럼 일으켰다. 그렇게 긴 가방 끈을 갖고 2년 전 난 그토록 원하던 치과의사 면허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내 일"이 생기니 엄마가 말씀하신 그 능력이, 스스로를 존중하는데 다소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았다.

온전한 나의 책임이 주어진 "일"로 인해 나는 또 다른 자아를 형성해간다.


나를 가꾸어간다는 건 단순히 직업의 유무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다만 내 일이 생기고 난 스스로를 위해 조금 더 부지런해졌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해 갈 의지와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이러한 '후천적 노력' 이 투영된 자신감과 아우라는 나이가 들 수록 빛을 발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젠 엄마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내 나이였을 엄마에게 마음의 상처가 있다면, 엄마를 닮은 지금의 내가 그 아픔을 메워주고 싶다.


그리고 난 여전히 엄마 같은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

어진 엄마, 현명한 아내. 이 세상엔 그만큼이나 가치있고 따듯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가정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면 내조에 집중해야 할 시기도, 일을 쉬어가야 할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다만 그 모습이 나의 "전부"가 되지 않는 것. 그게 엄마가 바라시던 바 아닐까?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엄마는 고고학자의 꿈을 이루어 세계 이곳저곳을 다녀보고 싶다고 하신다.


다음 생이 있다면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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