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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da music studio Jul 16. 2024

이 온도, 습도, 분위기

비 내리는 날 야외 클래식 연주는 어떻게 하는 걸까?


강 건너 불구경만큼 따스한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일이 또 있을까!

  내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자면 망해도 거하게 망한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연주 일화가 떠올라 미소를 거둘 수가 없다. 얼마나 거하게 망했냐 한다면 무려 당시의 영국 국왕 조지 2세가 직접 의뢰한 공연이 망해버렸다! 그것도 유럽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긴 정치 전쟁을 종결한 평화조약 체결 기념 불꽃축제 행사에서. 물론 헨델의 음악이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의 원인은 그다지 놀랍지 않게도 영국의 날씨였다. 비가 내렸던 것이다.


  연주된 곡은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music for the Royal Fireworks)’이었다.

헨델은 처음에 이 곡을 평범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작곡했다. 하지만 국왕의 음악 취향을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지적에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미 작곡한 곡의 편성에서 현악기를 완전히 빼고 금관악기와 타악기의 비중을 꾸역꾸역 늘릴 수밖에 없었다.(이것은 작곡가들에게 아주, 아주, 아주, 귀찮고, 불만스럽고, 비이성적이고, 서러운 일이다.)  이것이 불행이었는지 다행이었는지, 그 선택이 악천후에서의 연주를 수월하진 않아도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게 했다. 만약 현악기가 편성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빗물에 젖은 현과 활이 미끄러져 아예 소리 자체를 낼 수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타악기나 관악기들이 빗속에서 양질의 소리를 만들어냈을 리가 만무하고 촉촉이 젖어 들어가는 악기의 목재와 가죽, 정교한 금속 부품들을 기리는 연주자들의 눈물이 빗물에 섞여 들어 흘렀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국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그 정도면 그나마 값싼 대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A View of ye Grand Theatre & Fireworks erected on ye Water near ye Court at ye Hague

당시의 모습을 (근사하게) 기록한 그림. 1794, Robert Laurie

건물과 조형물들은 오직 이 행사를 위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


  그러나 폭죽을 담당하는 쪽의 사정이 너무나도 처참해 오케스트라의 고군분투가 무색할 정도였다. 날씨 때문에 시야가 좋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물에 젖어 폭죽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고, 화려한 기술력을 담은 메인 폭죽은 아예 불발이었다. 심지어는 잘못 발사된 폭죽에 부상을 당하거나 불이 붙은 옷을 벗어던지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속출하는가 하면 화약고를 포함한 건축물들에 화재가 발생해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강 건너 불구경 좀 해보려다 이런 사달이 난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성을 잃은 기술자 세르반도니(Jean Nicolas Servandoni)는 행사 진행자와 칼을 겨누며 싸우다 체포되었다고도 한다. 동시대 소설가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은 그날 밤을 표현하는 데에

‘pitiful and ill-conducted’
(측은하고 불량스러웠다)
‘very little mischief was done, and but two persons killed’
(인명피해는 아주 작았는데, 두 명 밖에 죽지 않았다)

- Denn 의역


라는 문장을 사용하며 비꼬았으니 당최 어느 정도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는지 상상도 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이 연주를 위해 이미 57명의 관악기와 타악기 연주자가 대거 필요함에도 실제로 헨델은 그에 더해 무려 100명이 넘는 연주자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또 런던탑에서 따로 거대한 북(세르팡, serpent)까지 빌렸다고 하니 어지러운 난리 통에 연주가 어찌어찌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는 행사 중 벌어진 여러 사고들이 오히려 연주를 훌륭해 보이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그나마 작은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재앙과 같던 축제날로부터 약 한 달 뒤, 파운들링 병원(Foundling Hospital)에서의 연주에서 헨델은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현악기를 포함한 편성으로 재편곡해 본래 구상했던 음악으로 완성해 냈다. 이 곡은 다섯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비대하고 편향되었던 편성이 균형 있게 수정되었지만 어째서인지 2악장에서는 금관악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헨델이 국가적 행사에 사용될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선보이지 못하고 억지로 금관악기를 잔뜩 추가해야 했던 것에 대해 커다란 한을 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뭐, 아니면 말고.

Händel  中 2악장의 시작 부분. 위에서부터 두 오선은 바이올린과 오보에, 가장 아래의 오선은 첼로와 콘트라베이스, 바순이 연주한다.




  다행히도 오늘날에는 꽤나 정확하게 미리 날씨를 예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천재지변의 상황에서도 강압적으로 연주를 강행해야 하는 융통성 없고 권위주의적 행사를 찾아보기도 어렵다(이 문장은 절대로 특정 기관이나 행사를 지적하는 정치 비판적 발언이 아님. 뭐, 아니면 말고). 필요하다면 현대 문명의 이기인 스피커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여하튼 조금만 미심쩍은 날씨의 낌새에도 가차 없이 취소되고, 애초에 그리 흔하게 기획되지도 않는 것이 바로 야외 클래식 공연이다.

‘빗물 정도라면 녹슬기 전 얼른 탈탈 털어내고 닦아내고 드라이기로 뽀송하게 말리면 그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비단 빗물만이 문제가 아니다.


  일단 비가 오는 날은 습도가 높다. 특히나 나무나 가죽 소재의 악기는 습기에 취약하다. 습기를 머금은 악기는 음색이 나빠질 뿐만 아니라 드럼과 같은 경우 습기가 많으면 가죽이 늘어져 음정이 낮아지기도 하고, 너무 건조하면 갈라지거나 찢어질 수도 있다. 실제로 지난 2023년 봄, KBS 교향악단의 제787회 정기연주회 도중 격렬한 부분을 연주하던 중 팀파니가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너무 건조한 날씨 때문에 습도 조절을 위한 장치들을 사용했음에도 악기가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팀파니는 오케스트라의 타악기 연주자 중에서도 수석 연주자가 선점해 담당하며, 다른 타악기를 겸하는 경우도 거의 없이 오직 팀파니만을 연주한다. 이러한 존재인 팀파니가 찢어져 버렸으니 말 그대로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다행히도 유명 오케스트라의 수석 연주자 다운 대처로 나머지 멀쩡한 팀파니 중 하나의 음정을 신속하게 조정해서 찢어진 팀파니를 대신하는 기지를 발휘해 연주를 무사히 마치고 감탄과 존경의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었다.


Kbs 교향악단 youtube 영상: [긴급] 중요한 공연 중 팀파니가 찢어졌습니다


  습도가 주로 악기의 내구성에 관여한다고 한다면 온도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지난 2023년 가을 즈음 며칠간 유난히 겨울처럼 추운 날들이 있었다. 하필 그런 날들 중 하루, 심지어 남산의 정상에 위치한 팔각정 앞에서 야외 클래식 버스킹 공연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정규 오케스트라의 규모까지는 아니지만 목관악기들과 현악기, 피아노, 타악기까지 많은 연주자들이 참여한 결코 작지만은 않은 프로젝트였고,

애석하게도 그 공연에서는 나의 곡이 연주될 예정이었다.

악기를 온도 변화에 노출시키는 것은 부품들 사이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에 당연 악기를 망가뜨리는 지름길이다. 때문에 연주자들은 얇은 정장 차림에 긴 시간 동안 야외에 대기하며 덜덜 떨면서도 기꺼이 손에 들린 핫팩의 온기를 악기와 함께 나눴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연주가 진행되는 도중 점차 음정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현악기의 경우 온도가 낮으면 현이 수축해 음정이 높아진다. 그에 반해 목관악기는 따뜻한 숨과 바깥의 찬 공기의 온도차로 인해 맺힌 물이 악기에 흡수되고 그것이  팽창하면서 오히려 음정이 낮아진다. 결국 현악기는 위로목관악기는 아래로 서서히 음정이 멀어지는 대 환장 파티가 열리게 된다. 그 현상이 수개월 동안 곡을 쓰고 모두가 모여 연습한 바로 그 공연에서 발생한 것이다. 공연 직후 관악기 연주자 중 한 명이


“분명히 나는 ’ 파’ 음을 내고 있는데 실제 소리는 ‘미’로 흘러나올 정도로 악기의 음정이 낮아져 공연 내내 최대한 음정을 높이려 안간힘을 썼다."


라고 이야기했고 이에 현악기 연주자들은 악기 음정이 점차 높아져서 같은 음정을 내기 위해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위치를 짚어야 해 어려움을 겪었다며 동조했다.

(이 공연을 기획한 단체 운영진은 차마 예정했던 대로 자신들의 유튜브 계정에 이러한 모습을 업로드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그 어디에서도 영상이나 음원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작곡가 본인인 나조차도...)


  익히 알려져 있듯 전문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악기들의 가격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연주자는 앞선 수많은 이유들로 인해 전문 연주장 외 장소에서의 연주를 극도로 기피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모든 연주자가 그러한 무대에만 설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비교적 꽤 많은 연주자들이 대안책으로 중요도가 낮거나 야외연주와 같은 악기에 손상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보다 부담 없이 굴릴 수 있는 하위 클래스의 두 번째 악기를 구비해두기도 한다. 실제로 남산에서의 연주에서 대기 중이던 수석 바이올린 연주자가 실수로 바이올린을 돌 구조물에 부딪히는 일이 있었는데, 순간 모두가 시선을 모으며 숨을 삼켰지만 이내

“아, 이거 세컨(second)이라 괜찮아.”

라는 말에 다시 안도의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쯤 되면 악기 연주자들이 항상 악기를 케이스에 꽁꽁 싸매고 온 습도 조절에 목숨을 거는 것이 전혀 과한 처사가 아님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재밌는 사실, 내 몸 하나 뉘일 공간 마련하는 것도 어려운 이 시대지만 서도 대부분의 연주장에는 오로지 피아노 보관만을 위해 24시간 온습도가 조절되는 전용 방이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가 직접 목격하기는 어렵지만 피아노의 경우 온도가 높으면 여러 복잡한 부품들이 팽창해 똑같이 건반을 눌러도 해머가 현을 치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려 소리가 평소보다 늦게 나게 된다고 한다.

아주 미세한 차이일지라도 만약 우리가 게임을 할 때 입력에 약간씩 딜레이가 생긴다고 상상해 보면 이것이 연주에 있어서 얼마나 불편하고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을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는 있다. 




2022년 여러 음악 활동이 장기간 중단되거나 제한되었던 상황이 해제되며 ‘마스크’라는 주제로 평창대관령음악제  야외 연주장 ‘뮤직텐트’에서 진행된 오케스트라 연주


  그러나 이런저런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주장 바깥에서는 클래식 연주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고,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해마다 열리는 평창대관령음악제는 아시아에서도 손꼽히는 세계적인 클래식 페스티벌이지만 주요 고정 프로그램으로 반드시 자연 속에서의 야외 공연을 동반한다.

애초에 공연장 자체가 첩첩산중에 위치해 있다.

관객들은 한여름 밤의 숲 속에서 음악뿐만 아니라 그 순간을 경험하고 기억하게 된다.

만약 언젠가 더 많은 관객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음악을 전달할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공연을 기획하고, 시도하고, 부딪혀 애쓰는 음악가들을 마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소보다 더 크고 관대히 박수를 쳐서 그들을 응원하고 격려해 주었으면 한다.


네이버 항공지도로 바라본 콘서트홀 전경과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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