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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da music studio Aug 16. 2024

음악 속의 이스터에그

배운 변태들의 유쾌한 장난


경고!

이 기사는 음악 청취를 동반하며 적극적으로 권장하오니 사무실이나 지하철, 버스에서 읽고 계시다면 이어폰과 함께 만반의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기나긴 문명의 시간 동안 수많은 창작물들이 등장했고, 역사 속에서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보완되고, 부정되고, 발전되고, 혁신되어 왔다. 하다못해 우리가 내뱉는 모든 문장조차 타인의 문장을 재편집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튼 우리는 같은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가 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마찬가지로 창작물에 있어서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오로지 나만의 것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디: 어ㅋㅋㅋㅋ이겈ㅋㅋㅋㅋㅋ
오마주: 어! 이거!
표절: 어…? 이거…?


  표절, 모작, 샘플링, 오마주, 패러디… 그 판단의 척도는 역시 창작자의 의도가 가장 분명한 기준이 되겠지만, 아무리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한들 본인 외에는 진정한 의중을 단정할 수 없는 일이외다. 그래서 우리는 나름대로의 저작권에 관한 약속을 만들어 이들을 지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로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있는 장르의 음악들은... 그 작곡가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지라 대부분 저작권이 없거나 만료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인지 2024년 상반기, K-pop 시장에선 마치 유행처럼 너도나도 클래식 곡들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삽입한 음반들을 우후죽순 쏟아냈던 시기가 있었다. 레드벨벳, 블랙핑크, TWS… 이외에도 떠오르는 곡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 분야의 전설적 레전더리 고전으로는 2007년 8월 발매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꼽을 수 있다.


" 어라, ‘다시 만난 세계’에 클래식이?"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전주가 뒤 태연의 첫 보컬 멜로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굵직한 한 방이 지나갔다.

설명하기에 앞서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의 9번째 심포니, ‘Aus der Neuen Welt’를 바로 이어서 들어보자.


Antonín Dvořák, Symphony No.9,  ‘Aus der Neuen Welt’ 中 4th movement


  자, 여기서부터는 눈치싸움이다!

‘Aus der Neuen Welt’을 영어로 옮기자면 From the New World가 되시겠다.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면 '신세계로부터'가 된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라는 제목과 Into The New World’라는 부제까지, 물론 이 두 곡이 수상쩍을 정도로 비슷한 제목을 가지고 있긴 하다만 그래서 당최 둘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친절한 댄이 같은 음을 같은 색으로 칠해뒀으니 악보를 읽을 줄 몰라도 걱정 말라구!


리듬은 다르지만 선율의 음정이 완전히 일치한다!


  위의 악보에서 가장 위쪽에 위치한 악보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악보가 드보르작의 ‘신세계로부터’의 멜로디를 간단히 옮긴 것이고,

가운데 있는 것은 두 곡의 음을 가지런히 정렬시킨 것이다.

작곡가의 공식적인 입장은 밝혀진 바가 없지만 ‘신세계로부터’의 선율과 정확히 일치하는 ‘다시 만난 세계’의 선율이라, 이보다 더 짜릿하면서도 잘 가공된 이스터에그임을 부정할 수 있는 이가 과연 있을까!


  이처럼 잘 가공된 K-pop 신에서의 클래식 이스터에그의 예를 하나만 더 들자면, 2022년 10월 발매된 (여자)아이들의 ‘Nxde’가 떠오른다.


" 아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일단 들어나 볼까!

이번엔 난이도가 꽤 낮으니 긴장할 필요 없다.

(여자)아이들, 'Nxde'


  가사를 간단히 내용을 정리해 보자면, 비록 손가락질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타인의 고정관념에 개의치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재하겠다는 메시지라 할 수 있겠다.

이어서 들어볼 곡은 ‘하바네라’라는 제목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는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Carmen’  ‘L'amour est un oiseau rebelle(사랑은 길들지 않는 새)이다.


Georges Bizet, 'Carmen' 中 'L'amour est un oiseau rebelle'


  비록 짧고 변형되었지만 워낙 강렬하고 독특한 선율선이 반복되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무려 200년쯤 전 시대에 여성이 고혹적인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 자기 주체적인 삶과 사랑을 노래하는 파격적(?) 시나리오의 오페라 주인공의 아리아(Aria, 독창곡) 선율과 컨셉을 빌리다니, 아주 적절하고 훌륭한 재료 선정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남의 곡을 활용할 수 있다면 내 곡을 활용 못할 이유는 뭐람!


  2011년 발매된 아이유(IU)의 ‘너랑 나’의 가사가 8년 후인 2019년 발매된 아이유(IU)의 ‘시간의 저편’과 연결된다는 사실은 꽤나 감동적인 에피소드로 입소문을 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의외로 ‘라일락’ ‘좋은 날’이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알고 있었다면... 역시 최첨단 신세대 프리미엄 음악 큐레이션 웹매거진 <B열 13>의 구독자이십니다!


아이유(IU), '라일락'

어떻게 못 알아챌 수가 있지?


아이유(IU), '좋은 날'


  동일한 가사일 뿐만 아니라 '나 좀 들어주세요!'라는 듯 얹히는 피아노 선율, 심지어 정재형의 뮤직비디오 카메오 출현까지. 배운 변태들일수록 이런 요소들을 맛깔나게 요리해 낸다.

사실, 이렇게 아는 사람이라면 두배로 즐거워지는 유쾌한 장난은 비단 현대인만의 것이 아닌 예로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전통이다. 위의 예시들처럼 상징을 담거나 선대 거장 작곡가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려는 목적을 가진 경우는 수없이 많지만, 역시 그런 따분한 학문적인 내용보다는 서로 물고 뜯는 싸움구경이 제맛이지!



드뷔시의 클래식 디스전


  ‘다시 만난 세계’에서는 이미지와 주제를 더욱 강렬히 하기 위한 장치였다면 반대로 조롱과 비판♡의 목적으로 이러한 ‘장난’을 친 경우도 있는데, 의외로 ‘달빛(Claire de lune)’, ‘꿈(Rêverie)’과 같이 몽환스럽고 우아한 작풍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드뷔시(C.Debussy)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평소 어린아이와 같이 혼자서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고, 실제로 장난스럽고 익살스러운 분위기의 곡들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그중 자신의 딸을 위해 바친 모음곡 ‘어린이 정경(Children’s corner)’ 중 여섯 번째 곡이자 마지막 곡인 ‘골리웍의 케이크워크(Golliwogg's Cakewalk)’에 이러한 또 하나의 이스터에그가 숨어있다.


이번에는 원본을 먼저 들어보자.

바그너(Wagner)의 오페라, 'Tristan und Isolde'의 서곡(overture, 작품의 에피타이저)이다. 역시 현악기로 시작되는 멜로디를 주의 깊게 들으면 된다.

바그너(Wagner), 'Tristan und Isolde'의 서곡

  이 부분만 들어도 충분하다!

곡의 특성상 이 첫 시작 선율은 클래식 좀 듣는다 하는 사람들에겐 제목을 알려주지 않고 들려줘도

첫 음에서 "어? 이거?",

두 번째 음에서 "아~역시"

가 튀어나올 정도로 곡의 정체성을 꽉꽉 함축하고 있는 액기스나 다름없다.

다음 곡이 바로 드뷔시의 ‘골리웍의 케이크워크(Golliwogg's Cakewalk)’이다.


‘골리웍의 케이크워크(Golliwogg's Cakewalk)’


  드뷔시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서곡의 진지하고 비장한 선율이 드뷔시의 곡에서는 전혀 다른 익살스러운 분위기로 사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분위기가 다른 것뿐이라고 '오해'한다면 드뷔시가 섭섭해할 수도 있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 이 두 나라는 음악적으로 일종의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독일의 작곡가인 바그너가 ‘반음계적’ 성격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끝없이 부유하는 곡(Ex.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을 발표해 화제가 되자 '반-바그너 파'라고 불릴 정도로 바그너와 대립하던 드뷔시는 그에 반하는 ‘온음계적’인 방식으로 같은 선율을 해석해 낸 것이다.

  가족을 위한 곡으로 가불기를 걸어두고, 심지어 이와 함께 등장하는 마치 '깔!깔!깔!' 하고 비웃는 듯 톡톡 튀는 악상을 듣고 있자면 힙합씬의 디스전을 방불케 하는 도파민 생성기가 따로 없다. (이 문장은 공신력이 없는 개인적 감상입니다.)


  이 밖에도 다루고 싶은 작품들이 정말 많지만 여백이 부족하여 이를 모두 적지는 않겠다. 흠흠. 그러나 음침한 배변(배운 변태) 작곡가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의 곡에 여러 가지 은밀한 요소들(딱히 귀에 들리지도 않는 경우도 많다!)을 숨겨놓는 경우가 아주 많다.(나도 그렇다...) 왠지 모를 촉이 발동되는 곡을 접하게 된다면 어떤 이유에서, 어떤 의도의 장치들이 숨어 있는지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재밌는 음악 감상법이 지 않을까!




+ Bonus : 더 딥한 이스터에그를 갈구하는 독자를 위한 음악추천


  최근 'Dies Iræ'라는 아주, 아주, 아주 오래된 서양 교회의 위령미사곡 선율이 내가 평소 즐겨 듣던 곡에도 상당히 많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Dies Iræ

  대강 느낌이 딱 오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해 모든 영혼을 심판하는 진노의 날(Dies I) 죽은 이의 영혼을 가엾이 여겨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종교와 죽음은 예술계의 단골 레퍼토리가 아닐 수 없다!


'Dies Iræ'가 사용된 곡들


- 리스트(Listz), 'Totentanz'

- 라흐마니노프(Rachmaninoff), 'Etude, Tableaux Op.39 No.2'

- 라흐마니노프(Rachmaninoff), 'Rhapsody on a Theme of Paganini'

- 베를리오즈(Berlioz), 'Symphonie fantastique'

- 알캉(Alkan), 'Trois Morceaux dans le Genre pathétique, Morte'

- 브람스(Brahms), 'Intermezzos, op.118 no.6'

- 조지 크럼(George Crumb), 'Black Angels'

- 말러(Mahler), 'Symphony No.2, Resurrection'

- 생상스(Saint-Saëns), 'Danse Macabre'

- 류이치 사가모토(ryuichi sakamoto), 'M.A.Y. in the Backyard'


......정말 많다.

귀로 쉽게 들리는 정도로만 추려도 이 정도이다.

Dies Iræ가 등장하는 시점의 유튜브 링크를 연결해 둘 테니 맘에 들면 플레이리스트에 넣으시라!



소개음악

1. 소녀시대 '다시 만난 세계 (Into The New World)'

2.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Symphony No.9,  ‘Aus der Neuen Welt’

3. (여자)아이들, 'Nxde'

4. 비제(Georges Bizet), 'Carmen' 中 'L'amour est un oiseau rebelle'

5. 아이유(IU), '라일락'

6. 아이유(IU), '좋은 날'

7. 바그너(Wagner), 'Tristan und Isolde' 서곡(overture)

8. 드뷔시(Debussy), ‘골리웍의 케이크워크(Golliwogg's Cakew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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