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덕분에 나까지 동네 인싸가 되었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산책로도 있지만 인도와 차도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은 길들도 많아서 걷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행여나 뒤에 오는 차를 못 보고 유부가 뛰어들진 않을까, 앞에서 오는 자전거를 못 보는 건 아닐까 조바심을 내며 다녀오다 보니 다시 산책로에 진입하는 구간에선 긴장이 풀렸다. 그 구간엔 공사 중인 도로가 있는데 도로는 아직 정비 전이라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게 펜스로 막아두고 사람 한 명 드나들 수 있는 틈만 내어놓았다. 잠깐 여기서 너도 쉬고 나도 쉬자.
유부를 공간에 잠깐 풀어놓고 입구는 막은 채 펄쩍펄쩍 뛰며 놀고 있으려니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를 유심히 바라본다. 막혀있는 공간이라지만 개를 풀어놔서 불편하신가... 싶어 얼른 목줄을 잡았다.
- 유부, 이제 가자.
-... 혹시 저기 저 동네 사는 아가씨 아니에요?
아가씨는 아닌가?
- 에? 저 아세요?
- 맨날 이 흰색 강아지 산책시켜서 내가 자주 봤는데. 거기 보쌈집인가 있는 그쪽 어디 살지 않아요?
- 아. xxxx 집이요? 근처 맞긴 하는데...
- 맞지? 내가 맨날 본다니까.
아...? 저는 처음 뵙는데, 저를 아신다고요? ㅠ
동네에서 오고 가며 만나는 개엄마도 아니셨고, 정말 우리 집 인근에 사는 아주머니셨는데 나와 유부, 그리고 호군의 존재를 알고 계셨다. 집 창문에서 내려다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 아니, 어떻게 그렇게 강아지를 잘 키워요?
- 에...? 잘 키우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오줌 싸려고 산책하는 거예요.
- 아휴, 내가 보니까 진짜 시도 때도 없이 개 데리고 나오던데.
신랑이랑도 사이가 좋아 보이더라고.
아...? 에...?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다행히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게 아주머니 셔서 다행이다 싶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나쁜 사람이 진짜 이런 식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울고 싶어지는 게 사실이다.
유부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사람들에게 자주 다가가 인사하고 싶어 해서 동네에 사는 몇몇 분들은 유부가 지나갈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고 인사를 해주신다. 물론 유부는 그중에서도 간식 주는 삼촌, 이모만 좋아한다. 개가 작지 않다 보니 개들 사회에서의 사회성뿐 아니라 인간 사이에서도 사회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도 유부와 산책을 할 때에는 동네분들께 더 크게, 더 반갑게 인사드리곤 한다. 정말,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인싸질을 하고 있는 셈.
옆집 아저씨도 아줌마도 오토바이 타고 배달하시는 삼촌분들도 모두 유부의 좋은 이모, 삼촌. 산책할 때마다 만나는 개엄마 개아빠들과도 어느새 난 자연스레 인사를 하고 다가가 강아지끼리 서로의 냄새를 맡게 하고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서로의 성격을 주고받는다. 산책하다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저 앞에 큰 개만 보이면 달려가 인사하고 싶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 댁 개는 얌전한가요..? 저는 얼마나 더 끌려다녀야 이 아이가 좀 차분해질까요...? 깜짝이야, 다 정말.
동네에서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흰 개 데리고 다니는 아줌마, 혹은 유부 누나로 나는 포지셔닝 완료. 나를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내 행동은 더 조심스러워진다. 싫은 소리도 덜하게 되고 당황스러운 일이 있어도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내 옆엔 유부가 있으니까. 유부도 실수하고 누군가를 당황하게 만들곤 하니까. 내가 이해한 것처럼 언젠가 상대방도 나를 조금 더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껴서 나를 못 알아보는 세상이지만 유부 덕분에 나의 존재는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는데 유부 덕분에 세상과 소통하고 배려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다. 후후.
이런 요즘의 삶이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