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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별 Nov 18. 2022

밤의 지하철에서

창문 없는 작업실에 혼자 앉아 낮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가끔 누군가에게 전화라도 걸고 싶어 진다. 하지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게 싫어 그만둔다. 너무 외롭지만 외로워서 좋은 이상한 마음.


처음으로 집이 아닌 작업실 같은 공간, 선배가 내어준 한남동의 공유 오피스 2인실에서 그림을 그려본 그날엔 행복해서 기절할 뻔했다. 마법같이 집중이 되고 종이 위에서 색연필이 춤을 추었다. 끼니를 미뤄도 배가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았다. 다음날 화실에 달려가 (미대와 졸작을 경험한) 선생님에게 이 기이한 경험을 신이 나서 전했더랬다.


“선생님! 작업실 너무 좋아요!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만 그리게 돼요!”

“그쵸? 그게 바로, 몸이 망가지는 지름길이랍니다~”


그 뒤로 적어도 밥은 꼭 챙긴다. 밤샘 작업을 하고 싶어도 연필을 내려놓고 일어선다. 어차피 나에겐 아침 일찍 등원해야 하는 아이가 둘 있으니 작업실 폐인이 되는 건 불가능하다.


육아하는 사이사이 뛰쳐나와 작업실에 출근한 게 한 달이 좀 안 되었다. 화실에서 선생님과 나눈 대화 이후, 작업실에서 일하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다시 즐겁게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10월 29일이 있었고 작업실로 향하는 이태원역 출구 건너편에는 폴리스 라인이 생기고, 국화꽃들이 쌓였다. 참사가 일어나고 하루하루 작업실 밖을 오가며 겪은 마음은 작업실 안에서 겪었던 그것보다 더 기이했다.


첫 주의 이태원은 적막했다. 문을 닫은 가게들과 열었어도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가게들이 와중에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늦은 밤 이태원역으로 내려가는 그 번화가에도 행인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며 밤거리에 사람이 하나둘씩 늘더니 삼 주가 지난 오늘은 불금을 즐기듯 취한 사람들을 걸음마다 마주쳤다. 외국인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


엊그제 출근길엔 이태원 파출소 앞에 선 두 명의 순경에게 울음 찬 목소리로 소리치는 남자를 보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그곳을 지나치던 모두가 알 수밖에 없었다. 잠깐이라도 멈춰 서서 지켜보는 게 외치는 이에게도, 묵묵히 듣고 선 이에게도 미안할 것 같아 서둘러 지나쳤었다. 편의점에 들렀다 나오니 조금 전의 그 남자가 길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침 열 시에 소주를 병째 마시고 있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이태원의 낮과 밤은 유리되었다. 사람들도 역시. 이태원의 밤길을 다시 찾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11월과 크리스마스를 살 것이고, 이태원 파출소 앞에 웅크린 남자는 10월 29일을 살겠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미 다른 어느 날에 멈춰 있는 나도 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남자를 매일 그냥 지나치겠지. 우리는 저마다 다른 날짜에 멈춘 채, 아니면 멈추지 않은 채, 각자 아무렇지 않은 듯 나아가는 걸까. 그래야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집으로 향하는 밤의 지하철에서 나는 다시 작업실에 불을 밝힌 마음이 된다. 외롭고, 외로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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