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chael Tooley의 ‘도덕적 동등성 원리'에 대한 비판적 고찰
"태아"란 어떤 존재인지, 인간의 "생명"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주제는 시대를 초월해서 핫한 주제인듯 하다.
이에 대한 입장은 상당히 다양한데, "낙태"를 예로 들면, 극단적으로 가자면 "수정 직후부터 영혼을 가진 하나의 인간으로 여겨야 하며 낙태는 살인이다(pro-life)" 에서부터 "태아는 독립적 생존이 가능해지기 전까지는 모체에 기생하는 모체 기관 조직의 일부 또는 모체를 이용하여 자기증식하는 기생체일 뿐(fetal parasitism)이므로 낙태할 권리는 여성 자신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 까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매우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로마 가톨릭의 공식 입장이기도 하며, 후자의 경우는 여성인권운동의 발로에서 소위 '모성'에 대한 사회적 강요는 여성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라는 주장에서 파생된 것으로 알고 있다. 직접적으로 생물학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생물학 연구를 하게 되면 직접적으로 ‘생명'을 다루니만큼, 이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고자 한다.
우선, 다음 카드섹션을 읽어보기 바란다. 이것은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만들어 배포중인 이미지 카드 중 한 장이다.
이 주장의 주된 맥락은 모든 여성들에게 모성을 강요하고 여성에게만 출산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취지에서 시작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이를 자의로 중단했을 경우에 찾아오게 되는 죄책감 및 사회의 비난에 대항하는 논거로써 사용할 수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로써 많이 내세우는 것이 1950년대에 의료계에서 주장하던 fetal parasitism, 즉 태아는 모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기생체이기 때문에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모체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논리다. 그로써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하게 됐을 경우 낙태시술로써 임신과정을 중단하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명윤리학자 임종식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가 (당시 서울대 철학과 강사/가톨릭대 가톨릭생명윤리연구소 상임연구원)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철학자 Michael Tooley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글을 브릭(BRIC)이 발행한 웹진에서 찾을 수 있었다.(pdf 링크)
콜로라도 주립대학 철학과의 Michael Tooley 교수는 "the moral symmetry principle(도덕적 동등성 원리)"로써 "the potentiality principle(잠재력 원리)"에 반박하고 있다. 짧게 말해서 Tooley의 주장은 "태아는 생존권을 지닌 존재"라는 명제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인과과정 또는 관계를 새로이 만들지 않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심각하게 잘못된 행위로 볼 수 없을 경우, 그러한 과정이나 관계를 차단시키는 것 또한 그렇게 잘못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도덕적 동등성 논리"로 요약된다. 즉 (인과를 만들지 않는 행위인) 피임이 심각한 잘못이 아니라면 (인과를 차단하는 행위인) 낙태 역시 그렇게 심각한 잘못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그 근거로써 한 쪽이 살려면 다른 한 쪽이 죽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진 상황을 예로 들어 인간의 생명을 동등하다고 볼 경우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다른 쪽을 선택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는 설명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동등성"은, 그 행위의 "동기"를 인지함으로써 반박될 수 있다. 즉 "어떠한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살리지 않는 것"과 "어떠한 행위를 함으로써 죽이는 것" 사이에는 도덕적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필자의 말을 빌면. "어떤 행위가 자연적인 흐름을 차단했는지 그리고 자연적인 흐름을 차단한 것이 상대방의 죽음에 원인으로서 기여했는지가 그 행위를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데 있어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즉 자연적인 흐름을 시작하지 않는 피임과 그 자연적인 흐름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낙태 사이에는 도덕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태아’는 당연히 ‘인간’에 해당한다고 본다. 배추벌레나 배추흰나비나 배추흰나비 알이나 모두 배추흰나비라는 동일한 하나의 ‘종’으로 보는데 왜 유독 ‘인간’만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 또는 ‘생명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이건 ‘죄책감’의 문제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살인은 나쁘다’고 배운다. 물론 ‘대의’를 위한 ‘숭고한’ 살인 또한 존재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살인은 무조건 나쁘다고 배우는 것이 사실이다.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할 경우 낙태를 한 사람은 살인을 했다는 그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타인들의 ‘도덕적’ 비난 또한 감수해야 한다. 여기에서 자유로우려면 내 생각에 ‘(모든) 살인은 나쁘다’는 개념에서 벗어나거나, 아니면 ‘태아는 (아직) 인간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 크게 두 가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않나 싶다. 페미니즘의 경우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후자를 택하는 경향이 있는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취지’는 이해하나 ‘동의’는 못하겠다고 할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전자를 지지하되, 결정까지의 과정은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태아는 사람인가" 여부에 대한 입장은 첨예하고 복잡한 윤리적-철학적 이슈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사실 이 주제에서는 어느 한 쪽을 무조건 옳다-그르다 규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며, 실제로 그 어떤 주장도 반대되는 주장에 확고하게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쉽게 가는 법이 있긴 하다. 극단적으로 가면 된다. 수정 또는 착상 직후의 태아를 성인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고 그에 대한 기본권을 모두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태아는 그 자체로써 '인간'이라 할 수 없으며 단지 모체라는 '숙주'에 연결되어 영양분을 먹고 증식-분화하는 '기생체' 또는 '암세포와 비슷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삶이 언제나 그렇게 극단적으로만 흐르던가? 그렇게 되면 결국 "관점의 차이"에 대해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만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기 마련이다. 무릇 "윤리"나 "철학"의 문제는 "과학" 또는 "사실"의 문제와 많이 다르다. 일단 그것부터 인정하고 나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듯 하다.
(생명윤리와 관련하여 임종식교수가 BRIC 에 올린 글은 총 세 개로, 이 링크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임종식(2003). 태아는 어떤 존재인가?-잠재력논변을 중심으로. BioWave, 5(2): 2. Available from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review0&id=493 (Mar 17,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