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방향이 분노일 때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기실, 내 마음의 방향이 미움이라서일 수 있다. 내 마음이 가는 길에 누가 얻어 걸린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가닿지 못한 미움은, 간혹 자신에게 향해서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기도 한다.
어제, 상담원과 통화하다가 나는 개진상으로 상담원에게 쏘아붙이고 짜증을 쏟아 부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상담원이 맞고 내가 틀렸다는 걸 알고 나서 너무나 부끄러웠다. 사실은 나도, 상담원이 나보다 을이라고 생각해서 짜증을 그렇게 퍼부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더니 “그럼 만약 네 말이 맞았으면, 화를 냈어도 됐다고 생각해?”라고 했다. 나는 “그럼, 화 낼 수 있지!”라고 대답했다가 곧 “아니, 그래선 안 되지......”하고 깨달았다. 어느 쪽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서, 그 편이 화낼 권리를 갖고 있다는 건 아니다.
요즘 또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 있어서 화내고 짜증을 속으로 부앙부앙 내다가, 성찰하면서 깨달은 점은, 내 마음의 방향이 분노와 짜증이라 그게 누군가에게 흘러간다는 점.
회사에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한다) 늘 ‘00은 너무 문제야’라고 말하고 그 00는 그 대상이 본부장, 팀장, 과장, 대리, 주임 등으로 바뀔 뿐이다. 그 본부장, 팀장,...등등이 사라져도, 다른 대상으로 바뀌어 ‘00은 문제야’라는 미움의 마음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나도 제작년에는 저 사람을, 작년엔 이 사람을, 올해는 또 누구를 계속 흉보고 있으니까. 내 마음에 미움의 습관이 있는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툭하면 “내가 화를 안 내게 생겼어!!!”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그 화는 정당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자기입장에서는 화를 내는 게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당연하지 않다.
분노하면 안된다, 화는 나쁜 거라는 식의 소리가 아니다.
교회에서 분노하지 말라, 화내지 말라 가르치면 꼭 사람들이 의분(義憤)이니 공분(公憤)을 들먹이면서 어떤 경우에도 분노하면 안 되느냐고 따지곤 한다.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을 막론하고 꼭 그렇다.) 그러나 그건 자기의 분노를 포장하는 수단이지 실제로 그 분노가 마땅한 분노이냐 생각해보면 안 그럴 가능성도 높다. 광화문 사거리에는 그 ‘의분’이며 ‘공분’에 차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무리를 365일 늘 볼 수 있는데,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분노에 공감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분노는 자의적이고, 나의 분노는 의분일까?
또는, 나는 정말 분노해야 할 때는 침묵하지 않는가?
이를테면, 누군가의 인권이 침해될 때 우리는 쉽게 눈을 감아 버린다. 환경 정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건 중요하지 않아’라며 무시한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나보다 약한 사람으로 보이면 바로 목소리를 높이곤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는 화내는게 맞고 어떤 경우는 틀리고 이렇게 상황별 잘잘못을 따지는 데 에너지를 쓰는 건 일상생활을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완벽해질 수 없는 인간이니, 그 에너지로 조금이라도 분노조절을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 쓰는 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실제적인 길이다. 분노의 본질은 무엇인가, 옳은가 그른가 분석하는 그런 문제는 학자들이 아카데미에서 토론할 일이고, 내 매일 매일의 삶의 질을 올리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모든 감정과 행동을 계속 열정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건 (필요하긴 하지만) 너무 피곤한 일이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감정’에 집중하면서 그 사람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를 곱씹는 것보다, 기분좋은 일에 몰두하는 게 내 마음에 더 도움이 된다. 실제로는 그냥 조금 더 자고 조금 더 잘 먹고 짜증나는 대상(회사라거나 사람이라거나)에서 떨어져 즐거운 걸 더 많이 보는 게, 내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고, 그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일 거다.
계속 내 마음이 미움의 습관을 갖도록 두지 말자. 올해의 나는, 계속 뒤에서 미워하고 흉보는 대상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없을 수는 없을 거 같고, 매일 짜증을 내지는 않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