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집밥을 먹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다른 여행은 몰라도 이번 여행만큼은 100%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랑 여행을 하면서 적어도 하루에 한 끼는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니까 말이야.
어제저녁엔 엄마의 사랑 알버트 하인(Albert Heijn)에서 산 카레 페이스트와 처음 보는 소시지를 넣은 카레를 먹었어. 비록 쌀이 한국 쌀이랑 다르게 입안에서 폴폴 날아다니는 안남미지만, 그래도 카레를 좋아하는 우리 모녀 입맛엔 무척 맛있었지. 오늘 아침엔 따뜻한 누룽지에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 촉촉하게 살짝 익힌 신선한 채소들이 식탁에 올랐어. 소박한 밥상이지만 여행자에게 이보다 진수성찬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우리에게는 마지막 한 방! 볶음 고추장까지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지!
엄마랑 같이 여행을 하니까
꼭 집을 통째로 들고 다니는 기분이야.
엄마는 모르겠지만, 여행 중에 엄마 밥 먹는 거... 그게 되게 기분 이상하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여행은 대부분 혼자이거나 친구들과 함께였잖아. 그러니까 밥은 무조건 사 먹는 거였고, 가끔 한국 음식이 당기면 비상용으로 한 두 개 가지고 온 컵라면을 가방 깊숙한 곳에서 꺼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먹는 정도였지.
그런데 지금은 엄마랑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구경하고 장을 봐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있으니... 여기가 네덜란드인지 한국인지, 시공간이 뒤틀려 그 두 나라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미지의 공간에 진공 상태로 떠있는 건지 헷갈려. 그야말로 '여긴 어디? 난 누구?'랄까.
말하고 보니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몇 번 더 있었다. 나 20대 초반에 어릴 때부터 친했던 동네 친구랑 멕시코 여행 간 적 있잖아. 그때 딱 이랬어. 분명 내가 있는 곳은 난생처음 온 낯선 나라인데,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올라!(Hola!)" 밖에 없는데, 그 친구가 옆에서 재잘거리고 있으면 거기가 그냥 강동구 명일동인 거야.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피라미드인 떼오띠우아깐 (Teotihuacan)을 동네 놀이터 정글짐으로 만들고, 칸쿤에서 가장 유명한 클럽인 코코봉고(Coco Bongo)를 천호동 나이트클럽으로 만드는 게 그 친구의 목소리였지. 나는 그때 아무리 낯선 곳에 있어도 너어-무 가까운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그 사람의 에너지가 낯선 장소의 에너지를 이겨버린다는 걸 알았어.
그러니... 친구랑 가도 그 정도였는데, 엄마는 오죽하겠어. 집이야 집. 어딜 가도 집이야. 몸으로는 여기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인 걸 알겠는데, 엄마가 옆에서 밥을 해서 먹이니까 마음은 집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정말 기묘한 경험이야.
솔직히 이런 상태가 좋은 건지 아닌 건지는 잘 모르겠어. 엄마가 있어서 마음이 편하고, 날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익숙해서 좋기도 하면서... 비행기 타고 이 먼 곳까지 왔는데 엄마 덕에 너무 집처럼 편하니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살짝 아쉽기도 해. 웃기지? 크크.
엄마는 어떨까? 다 내려놓고 엄마도 좀 쉬려고 온 여행인데...
여기까지 와서도 딸년 밥해 먹이느라 동동거리고 있는 자신이 짜증 나진 않을까? 아니면 나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익숙함 덕분에 이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를 조금은 더 편하게 느끼고 있을까? 어쩌면 그 둘 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