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반 고흐 미술관이야.
어려서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던 엄마는 언제나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어. 미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그 시절 줄줄이 형제가 많은 집에서 막내딸까지 대학 공부를 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 그래서 엄마는 혼자서 그렸어. 계속 그렸지. 덕분에 어릴 적 나와 오빠의 방은 엄마의 작은 갤러리였어. 벽에는 아기 돼지 삼 형제 벽화가, 창문에는 색색의 시트지로 오려 만든 각종 캐릭터들이 가득했지.
나와 오빠가 중고등학생이 되어 엄마의 손이 덜 필요해지자 엄마는 그림 교실을 다니기 시작했어. 캔버스와 붓을 사고 거실엔 이젤을 세웠어. 유화 물감과 그걸 씻어내는 석유의 강렬한 냄새가 온 집안을 채웠어. 당시 나는 엄마가 TV에서 보던 밥 로스 아저씨처럼 붓을 기름통에 넣어 흔들고는 탁, 탁, 털어내는 걸 보는 게 좋았어. 뭔가 멋지잖아. 물감으로 얼룩덜룩한 철제 통의 안 쪽을 붓으로 박력 있게 두드리는 게 말이야. 뭐랄까, 담배를 피울 때 손끝으로 재를 탁, 탁, 털어내는 것과 같은 몸짓이랄까.
그림을 그리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그렇게 중간중간 무심한 듯 확실하게 작은 마무리를 하는 모습이 내 눈에는 굉장히 프로페셔널해 보였던 것 같아. '뭐 이런 것쯤이야. 늘 하는 거지. 후후후.' 이런 느낌.
엄마는 그렇게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줄곳 그림을 그리고 있어.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지만, 결국 엄마는 여러 차례의 대회 수상과 개인전을 거쳐 화가협회에 등록된 화가가 되었어. 그렇게 '공식적으로' 화가가 된 날, 협회에서 발급된 화가증을 들고 엄마는 말했어.
"이젠 누가 엄마 직업을 물어보면, 당당하게 화가라고 말할 수 있어."
그때 엄마의 그 벅찬 눈빛이 기억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던 소녀는 50년이 지나서야 스스로의 힘으로 그 꿈을 이룬 거지. 얼마나 멋진 일인지. 나는 그런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웠어. 그래서 대답했지.
"엄마, 앞으로 여행할 때 입국 서류 직업란에 자신 있게 화가라고 적어! Painter, Artist!"
지금의 난 글을 써. 글을 쓰지만 아무도 내게 '작가증' 같은 걸 발급해주진 않았거든. 그래서 내가 '공식적인 작가'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어. 네 권의 책을 출판하긴 했지만 그중 제목만 말하면 누구나 아는 베스트셀러는 한 권도 없어. 마치 반 고흐가 수 천 장의 그림을 그렸어도 아무도 그를 몰랐던 것처럼 말야. 내가 반 고흐처럼 천재적인 작가라는 건 아니고. 말하자면 그렇단 거야.
그래서 전엔 누군가 직업을 물어보면 우물쭈물 대답을 못 하거나 백수라고 대답하곤 했거든. 그런데 이젠 정말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네. 난 엄마 딸이니까! 나도 입국 서류 직업란에 당당히 Writer라고 쓸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매일 글을 쓰는 내가 작가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작가일 수 있겠어?
엄마,
반 고흐에게도 화가증이 있었을까?
아마 아닐 거야. 반 고흐는 이렇다 할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거든. 심지어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펀의 미술 학교에 등록했다간, 몇 달 만에 그곳에 있던 외젠 시베르트라는 교수에 의해 퇴학을 당하기도 했지. 그래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열심히 모사하면서 미술을 독학으로 익혀. 엄마처럼 말이야! 아니, 반 고흐가 훨씬 오래전 사람이니까 그 반대일까.
이곳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선 200여 점의 유화와 500여 점의 소묘를 소장하고 있어. 특별 전시실에는 그가 썼던 편지 750여 점이 전시되어 있지. 엄마와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1층에서 3층으로, 다시 2층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그의 작품을 감상했어.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그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하기까지 단 10년 동안 만들어 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사실 엄마는 요즘 약간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거든. 10년 넘게 그림을 그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매번 비슷한 그림만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 뭔가 새로운 걸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지만 쉽지 않았어. '이제 새로운 걸 그려보자!' 하고 생각한다고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걸 그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굉장히 답답해했는데, 아무래도 이곳에서 조금의 힌트를 얻고 있는 것 같아.
엄마는 지금 내 옆에서 반 고흐 특유의 자유로운 붓터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왜 항상 하던 대로만 했을까, 의문을 가지면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하네. 응응, 응원할게. 엄마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고 하잖아. 난 엄마가 끝내 해내는 모습을 10년이 넘게 지켜보면서 분명 뭔가를 배웠을 거야. 그게 내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 발현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내 딸에게도 뭔가를 배울 수 있는 등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면 그건 100% 엄마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
고마워. 내게 엄마의 멋진 등을 보여줘서.
계속 그러고 있어, 나 잠깐 1층 가서 굿즈 좀 사 올게.
아니 이 '감자 먹는 사람들' 감자칩이랑 '아몬드 꽃' 테디 베어는 정말 꼭 사야 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