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 마, 어떻게든 되니까

by 김별


엄마,

지금 나랑 같은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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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냥 내릴까?


여긴 함부르크를 관광하는 여행객들이 한 번쯤은 타본다는 62번 페리의 1층 여객 칸이야. 교통권만 있으면 특별히 티켓을 사지 않아도 그냥 탑승할 수 있는 대중교통인 62번 페리는 함부르크를 독일 제1의 항구이자 유럽 제2의 항구로 만들어 준 '함부르크 항'을 왕복 1시간 코스로 둘러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알려져 있거든.


이 커다란 배가 대중교통이라니, 여기가 함부르크의 엘베 (Elbe) 강이 아니라 서울이라고 치면 한강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배가 버스나 지하철 환승이 되는 거랑 똑같은 거잖아. 신기하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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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여러 개의 선착장이 모여 연결되어 있는 란둥스브뤼켄 (Landungsbrücken)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사람들이 62번 페리를 기다리기 위해 기다란 줄을 늘어서 있었거든. 어쩐지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것 같더라고.


처음 배에 올라타고 든 느낌은 '앗 뜨거워' 였어. 아니 일단 너무너무너무 더운 거야. 숨이 턱턱 막히는 1층 사방으로 나있는 창문을 뜨거운 태양이 뚫어버릴 듯 내리쬐고 있었어. 어쩐지 아무도 여기 안 앉아 있더라. 그래서 사람들을 따라 계단 위로 올라가 봤더니 거긴 또 콩나물시루인 거야. 햇빛을 가려주는 지붕이 없으니 당연히 직사광선이 정수리에 강스파이크를 때리고 있는 환경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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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난 이때부터 페리를 타고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다는 다양한 관광지들이 어디였는지 기억도 안 나고, 그냥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라. 그... 그렇지만 우린 여행객이고 여긴 무려 독일이고 여기까지 와서 남들 다 보는 걸 안 보기도 뭐하고... (여길 또 언제 와보겠어!) 게다가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슬쩍슬쩍 엄마 표정을 살피면서 눈치를 봤거든.


그러다 엄마랑 눈이 마주쳤는데, 엄마 눈이 말하고 있더라고.


"별아, 재미없다."


아 그때 그 눈빛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하하하. 게다가 엄마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 말했어.


"야 그냥 여기서 내리자."


아니 그 생각을 나도 안 한 건 아닌데... 내가 지금 어디 위에 떠있는지도 전혀 모르는데 내려서 어쩌나 겁이 나서 차마 말은 못 하고 있었단 말이지. 게다가 해가 너무 뜨거워서인지 아까부터 내 아이폰이 자꾸 기절하고 있다고! 만약 길을 잃으면 구글 지도로 내 위치를 검색해서 숙소로 찾아가는 법을 알아내야 하는데 핸드폰이 죽어서 그걸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그냥 이대로 꾹 참고 1시간 버티면 탄 곳으로 돌아올 테니까... 그게 가장 안전하지 않을까 싶어 망설이고 있었지. 그런데 엄마는 배가 어딘가에 멈추려고 속도를 늦추자마자 내 손을 잡아끌며 단호하게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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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내려."


"아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내려. 무서워."


"됐어. 저기 내리는 사람들도 좀 있네. 뭐든 있겠지"


"숙소 어떻게 돌아가..."


"어떻게든 가게 돼 있어. 일단 내려."


그렇게 어, 어, 어, 하는 사이에 난 엄마 손에 끌려(?) 내려졌어. 우악! 하는 사이 배는 이미 멀어져 가고 눈 앞에는 읽을 수도 없는 표지판이 보였어. 난 솔직히 이때 정말 겁이 났거든. 그런데 엄마 표정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태연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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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있겠지'와 '어떻게든 가게 돼 있어' 라니.
아니 뭐 이렇게 대책 없는 엄마가 다 있담?!


막막한 마음으로 조금은 엄마를 원망하고 있는데 태연하게 눈 앞에 있는 길을 걷던 엄마가 "별아, 저기 봐!" 하고 날 불렀어. 음 뭐지? 엄마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하나 둘 옷을 벗더니 모래사장에 드러눕고 있는 거야. 여... 여기 바다? 아닌데 강인데?


오락가락하는 아이폰을 흔들어 깨워 다급하게 검색해 보니 여기는 노이 뮤렌 (Neumühlen)이라는 곳이고, 바다는 아니지만 해변 같은 분위기를 가진 곳이라 많은 사람들이 놀러 오는 나름 인기 명소였어. 모래사장 뒤로 보이는 언덕으로 이어진 산책로를 걷다 보면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사는 멋진 별장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네. 새... 생각보다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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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를 따라 걷다 보니 파라솔을 넓게 펼친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고, 그 옆에는 아이스크림 수레들도 있어서 나름 해변 휴양지 분위기가 물씬 나더라. 더위에 지친 우리도 한 곳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어. 엄마는 달콤한 파르페를, 나는 상큼한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열심히 숙소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지.


사실 이때까지도 나는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 '좋긴 좋은데 숙소에 어떻게 돌아가지?'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불안을 가득 안고 폭풍 검색을 하니 의외로 숙소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더라. 너무 간단하네? 걱정하고 동동거린 것에 비하면 모든 일이 너무 '괜찮아'서 아까 엄마를 원망했던 마음이 슬쩍 민망해졌어.


'정말이네. 뭐든 있고. 어떻게든 되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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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내가 더 많이 다닌 것 같은데... 역시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는 무시할 수가 없는 거다. 엄마가 인생 30년 선배인데 내가 그걸 깜박하고 까불었네. 크크.


오늘 엄마에게 여행에 대해 한 수, 아니 두 수 배운 것 같아. 하나는 쫄지 말라는 거! 어떻게든 된다고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된다는 거. 그리고 또 하나는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야 말로 여행의 진짜 묘미라는 것. 엄마 덕분에 오늘 난 어딘지로 모를 미지의 항구로 훌쩍 뛰어내리는 용기 뒤에는 생각도 못한 '강가의 해변'을 만나는 깜짝 선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엄마 이제 뭐할까? 역시 여긴 함부르크(Hamburg)니까 햄버거(hamburger)는 먹어줘야겠지? 이제 숙소 근처로 돌아가서 햄버거나 하나 때리자.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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