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버스 기다리는 폼이 거의 독일 아줌마다?
엄마는 여행이 갈수록 점점 더 적응력이 좋아지는 것 같아. 엄마와 함께 하는 여행인데 버스에 트램에...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는 게 괜찮을까 처음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엄마는 어디서든 엄청난 적응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었지 뭐야.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엄마를 몇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니 영락없는 현지인 포스가 물씬 풍겨서 웃음이 났어. 누군가 길을 물어보면 독일어로 대답해 줄 것 같아. 하하하.
자 그럼 우리가 오늘 현지인 포스를 풍기며 갈 곳이 어디냐? 바로 엄마가 이곳 함부르크에서 유일하게 관심을 보였던 '미니어처 원더랜드 (Miniatur Wunderland)'야.
솔직히 나는 여기 갈 생각이 1도 없었거든. 뭐 장난감 몇 개 작게 만들어 둔 곳을 뭐하러 가나, 싶었지만 엄마가 너무 좋아하니까 할 수 없이 일정에 넣었어. 사실은 미니어처 원더랜드가 위치한 곳이 유서 깊은 부두 지역인 하펜시티(Hafen city)였기 때문에 대충 구경하고 하펜시티를 둘러볼 생각이 내겐 더 컸지.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서 내리니 온통 붉은 벽돌들로 둘러싸인 도시가 나타났어. 세상에. 너무 멋지다 그치? 길게 늘어선 줄 끝에 서서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한 덕분에 특별히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어.
1시간 정도 기다린 끝에 우린 드디어 오후 1시부터 2시 사이에 입장하는 티켓을 살 수 있었어.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이렇게 입장 시간에 제한을 두고 팔고 있더라고. 아 참, 입장권은 인당 13유로였어. 난 속으로 워우 좀 비싸다 싶었는데 엄마는 그런 내색이 전혀 없네. 벨기에 초콜릿 박물관 6유로는 아깝다고 안 갔으면서... 웃기고 좀 귀엽다 엄마?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미니어처 원더랜드를 몹시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일단 규모가. 규모가. 어마어마하더라. 건물 세 개 층에 총 9개의 섹션으로 분산되어 있는 무려 6,800 m2 넓이의 공간에 38만여 개의 라이트와 26만여 개의 피규어, 300여 개의 움직이는 자동차, 그리고 작은 기차가 달리는 철로도 15,400m나 깔려있었어.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은 중앙통제센터에서 관리하고 있었지. 뭔가 '그냥 장난감' 수준이 아니었어. 거의 하나의 세계가 있더라고. 그래서인지 중앙통제센터에서 진지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이 원더랜드를 움직이는 신 같이 보였어. 대단했지.
엄마는 거의 입구에서부터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소녀처럼 꺄아꺄아~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돌아다녔어.
"어머 별아, 이거 봐 너무 귀여워!"
"저 자동차 터널에 들어가니까 헤드라이트 저절로 켜진다? 봤어? 봤어?"
"세상에 어쩜 이렇게 진짜 같니.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걸 다?"
눈을 반짝이며 미니어처들을 구경하는 엄마를 보니 여기 안 왔으면 정말 큰 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번 여행 통틀어서 엄마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신나 보였어. 우리는 난간에 매달려 손가락만큼 작은 자동차들이 신호등 표시에 맞춰 멈춰 서고, 좌회전을 하고, 또 달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한참을 재잘거렸어.
그러고 있다 보니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
나는 귀여운 게 좋아.
그래, 엄마는 귀여운 걸 참 좋아해. 그래서 작은 인형들이나 귀여운 장식품 같은 걸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 갖고 싶어 하지. 다 버려야 할 것들이라는 아빠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엄마는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인형 같은 것들을 아빠 몰래몰래 집 안에 숨겨 들어오잖아. 전에 애니메이션 라바의 레드 캐릭터 인형을 들고 와서는 "별아 이거 귀엽지? 엄마는 라바가 너무 좋아!" 했을 때는 솔직히 나도 속으로 조금 움찔했었어. 라... 라바는 애기들이 보는 거 아니야? 어... 엄마는 내일모레 환갑인데...
아니지 아니야. 환갑이면 뭐 어때. 환갑이 왜!
나는 엄마가 육체적인 나이를 초월하는 동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라 좋아. 그런 엄마의 모습을 사랑해. 꽃을 보고, 작은 인형을 보고 진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귀엽다고 감탄사를 내뱉는 엄마의 귀여움이 최고야. 나도 엄마처럼 내 안에 어린아이를 잃지 않고 늙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아마 그런 사람들이겠지. 작은 세상을 만들며 자기 안에 어린아이의 눈을 반짝이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미니어처 원더랜드에 있는 작품들은 단순히 현실의 어떤 것을 작게 만든 것이 아니야. 자세히 살펴보면 평범해 보이는 마을 풍경에도 나름의 스토리와 유머가 담겨 있지. 특히 공항 활주로에 뻔뻔하게(?) 서있는 스타워즈 우주선이나, 열심히 바닥을 구르며 다투고 있는 카우보이들 같은 것을 보면 이걸 만들면서 키득거렸을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우린 운 좋게 작업 중인 모습도 구경할 수 있었어. 이탈리아 섹션이었는데,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며 구경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작업에 집중하는 직원을 보면서 '아 나도 저렇게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
이곳의 모든 작품들을 빠짐없이 둘러보기엔 둘 다 체력이 너무 저질이라 우리는 슬슬 관람을 마무리하고 기차 좌석처럼 생긴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밥을 먹었어. 솔직히 음식이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차에서 사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정도였던 것 같아.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서 음식의 맛도 끌어올릴 줄 아는 마법이 이 공간에는 있었던 것 같아.
자 이제 미니어처는 그만 보고 진짜 국립 오페라 극장(Hamburgische Staatsoper)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볼까? 현실 세계로 돌아가자고!
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