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너는 기차

by 김별


엄마,

상상이나 해봤어? 기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일 말이야!



오늘은 독일에서 덴마크로 건너가는 날이야. 왜 그냥 가는 날, 이 아니라 건너가는 날, 이라고 하느냐고? 왜냐하면 이곳 함부르크에서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코펜하겐은 북해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 두 도시 사이에 바다가 있거든. 지금부터 독일의 고속열차인 ICE (Inter City Express)를 타고 5시간을 달려 바다를 건널 거야.


근데 엄마 나 알지?

어딜 가도 꼭 뭐 하나씩 빠뜨리고 오고, 뭘 해도 이상하게 어딘가 구멍 한 두 개는 뚫려있는 거.


나 있잖아... 한국에서 미리 기차표를 예매하면서도, 함부르크 중앙역에서 코펜하겐행 기차를 기다리면서도, 심지어 '5시간을 달려 바다를 건너 덴마크에 갈 거'라고 엄마에게 설명하면서도 정작 기차가 '어떻게' 북해를 건너는지는 몰랐다? 그게 몰랐다고 하기보다는 뭐랄까... 아예 생각을 안 했어. 그러니까 어김없이 내 의식에 구멍이 있었던 거지.


간다. 나. 코펜하겐. 기차 타고. 바다 건너.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기차에 올라서는 그저 오랜 이동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으려는 요량으로 지난번에 승자를 가리지 못한 스도쿠 퍼즐이 그려진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까 말이야, 어느 순간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제야 '어라, 저 바다를 어떻게 건너 가지?' 하는 의문이 들었지.


여기서 재미있는 건 엄마도 똑같았다는 거야.


브뤼셀 초콜릿 박물관 사건(?)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우린 참 많이 닮았기 때문에. 둘이 똑같이 바다를 눈앞에 두고서야 '어머나 세상에?'하고 놀라고 있는 거지.


언젠가 내 친구가 "넌 유전자 검사할 필요도 없어. 너네 엄마랑 너무 똑같아서."라고 말한 적이 있었어. 외모보다는 감성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였지. 바로 이런 순간, 나는 그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남몰래 고개를 끄덕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 별아 바다다!" 하는 엄마를 보면 '음 역시 유전자 검사 따위 할 필요 없겠어...'하고 확신하게 되는 거야.



와중에 기차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바다로, 바다 곁으로, 점점 더 다가갔어. 기차 안에 있는 그 어떤 승객들보다 이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우리 모녀는 서로의 얼굴과 창밖을 번갈아 보며 마치 격렬한 테크노 댄스를 추는 90년 대 여전사들처럼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지.


"뭐야 여기 항구 아니야? 오옷?"


"어머, 어머, 별아 기차를 배에 실을 건가 봐!"


"배가 얼마가 크면 기차가 들어가?"


"몰라 얘, 이 안에서는 안 보인다 배가 얼마나 큰지."


"어어어 들어간다! 오오오 어두워진다! 어디로 들어가는 거야!"


"멈췄다 멈췄다. (안내 방송) 뭐라는 거니?"


"내리래. 다 내리래."


"가방은? 캐리어는?"


"두고 내려도 된대. 혹시 모르니까 핸드백은 챙기자. 뭐야 사람들 다 내린다. 엄마 일단 일어나!"



우린 그렇게 어리바리 기차에서 내려 사람들을 따라 좁고 어두운 철제 계단을 올라갔어. 뭐냐 여기가 어디냐 배 안에 들어온 건가 어디로 나가야 하나 하면서 두리번거리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머나 세상에 나 이미 바다 위에 떠있네?


제대로 뜻밖의 선물이었지.

좁고 어두운 통로를 걷다가 갑자기 마주한 시리게 푸른 바다과 촉촉한 하늘은.


아직도 눈을 감고 그 순간을 떠올리면 눈 안에 푸른 물이 가득 차는 것 같아. 엄마랑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와아~와아~하고 기뻐했던 시간 말이야. 모든 걸 완벽하게 알아보지 않은 덕에 깜짝 선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게 참 재미있지 않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록 완벽한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말이야.


아마 이 배에 탄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 만큼 이 순간을 순수한 기쁨으로 채운 사람들은 없었을 거야. 기대하지 않았던 우연한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못한 삶의 변주들은 여행을 통해 만날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인 것 같아. 그러니 너무 다 미리 준비하려고 할 필요 없는 거지. 모든 걸 미리 아는 것보다는 이렇게, 가끔은 말이야.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기차가 바다를 건너는 1시간 동안 뜻밖의 반짝임을 선사한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 둘은 말없이 한참 동안 바라보았어. 엄마,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바다보다 안 질리는 건 세상에 없는 것 같아. 아니다. 엄마가 있구나. 엄마도 내 평생 봤는데, 아니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엄마는 공기처럼 너무나 당연히 내 삶에 존재했는데, 나 아직 엄마가 안 질린다. 바다처럼. 엄마도 그래? 나 아직 안 질리지?


엄마, 우린 아직 더 더 더 오래 바다를 볼 수 있는데 또 안내 방송이 나온다. 코펜하겐 갈 사람들은 이제 자리로 돌아오라고 말이야. 손에 남아 있는 샌드위치 조각을 어서 입에 털어 넣고 이제 일어나도록 해. 어디로 가야 할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 엄마가 아까 올라올 때 우리가 따라온 그 사람들을 찾아냈거든. 놓치기 전에 빨리 뒤에 붙자는 엄마의 말에 나는 들고 있던 다 마신 커피 잔을 쓰레기통에 급히 던져 넣고 일어났어.



아이고, 아슬아슬하게 겨우 탔네. 자리에 앉자마자 기차가 움직이잖아? 하마터면 이 배를 타고 알 수 없는 도시까지 갈 뻔했네. 내가 안내 방송을 잘 들었지. 엄마가 그 사람들을 잘 찾았지. 세트로 뻔뻔한 우리가 서로의 기지와 민첩함을 셀프로 칭찬하며 자리에 앉아 숨을 돌리는데 기차 안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웅성거려. '무슨 일이지?' 하고 창 밖을 보니 저 멀리서 젊은 남자 셋이 기차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네.


아이고 세상에! 다행히 승객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역무원에게 말해서 역을 떠나기 전에 기차가 섰어. 플랫폼을 뛰다가 기찻길로 내려와서까지 목숨을 걸고 (?) 달려오던 위험천만한 청춘들은 무사히 기차에 올랐고 말이야. 헐레벌떡 기차에 탄 총각들이 잘 익은 자두처럼 빨개진 얼굴로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기차 통로를 지나가고 사람들을 쿡쿡, 거리며 웃고 있어. 저 총각들에게도 이 순간은 예기치 못한, 그래서 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되겠지. 덕분에 우리에게도 기억에 남을 이야깃거리가 생겼고 말이야.


아 엄마 여권 어디 있냐고.......... 독일에서 덴마크로 넘어가야 한다고..............


자, 이제 코펜하겐 숙소가 어디인지 지도를 볼까?

어, 어디다 뒀더라? 어어어...


"엄마, 내가 지도 어디다 둔 지 알아?"


"별아, 엄마 여권이 어디 있을까?"


"..."


"......"


"?????"


"!!!!!!!!!!!!!"


아니 정말,
유전자 검사가 필요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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