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이 허공에 매달려 있어.
코펜하겐의 거리를 걷다가 굉장히 낯선 풍경을 만났어. 바로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가로등! 처음엔 건물끼리 실뜨기라도 하는 것처럼 복잡하게 널려있는 전선들과 거기 달린 거대 뚫어뻥 같은 가로등이 요상하고 신기해서 왐마 저게 뭐랴, 혹시 재수 없어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우린 '분명 이 동네에서 길 가다가 가로등에 머리 맞아 죽은 사람 있을 것 같다. 재수 없으면 사람 가는 거 순서 없다. 왜 어디선가 화분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지 않았냐.' 뭐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하면서 걸었지.
사실 나는 누구누구 닮아서 기우가 특기거든. 그래서 천장에 실링팬이 돌아가는 곳에 가면, 저게 갑자기 떨어지면서 뱅글뱅글 허공을 돌아 이 안에 있는 사람들 목을 차례대로 콩나물 대가리 따듯 똑똑, 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벌벌 떤다니까. 언젠가는 푸껫에 있는 거대한 텐트 모양 숙소에 묵었는데 마침 억수 같이 비가 오는 거야. 밤새도록 숙소가 무너질까 봐 어찌나 걱정을 했는지 몰라. 사실 말이 '텐트'지 어지간한 건물보다 거대하고 튼튼한 곳이었는데도 너무나 텐트 같은 외관 때문에 (텐트니까!!!) 난 '그래 봐야 텐트가 텐트지...' 하면서 자면서도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했단 말이야. 그러니 뭐, 오죽했겠어.
근데 계속 그렇게 긴장하면서 걸으니까 너무 피곤하더라?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기로 마음먹었지. 난 스스로에게 다그쳤어. '별아 별아 김 별아, 여기가 어디냐. 덴마크다 인마. 드링킹 요구르트를 그렇게 맛있게 만드는 나라에서 설마 가로등을 허술하게 만들었겠니?' 하고 말이야. (알아, 내가 말하는 드링킹 요구르트는 참치 만드는 그 회사의 전북 정읍에 있는 공장에서 국산 원유로 만들어진다는 거. 그래도 내 최애 음료니까. 이름에 덴마크도 들어가 있고. 그냥 넘어가자.)
뭐 아무튼 그렇게 자꾸만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며 가로등을 사랑의 눈(?)으로 보려 노력하니 어느 순간 되더라고! 뚫어뻥이 실버벨이 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바람 불면 달랑달랑 흔들리는 가로등에서 딸랑딸랑하고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
도시가 오래되어 건물과 건물 사이가 좁아 전봇대를 못 세워서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도 있고, 바람이 많이 불어 그렇다고도 하는데 뭐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 뭐 알게 뭐야 이미 내 눈에는 가로등이 예쁜 종으로 보이기 시작했고, 코펜하겐을 떠올리면 도시 전체에 작은 종이 달려서 마음으로만 들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음악을 연주해주는 곳이 되어버린 걸.
생각을 조금 바꾼 것뿐인데, 되게 별 거 아닌데, 그게 산책을 더 즐겁게 만들어 주더라. 엄마랑 '저기 봐라 저것도 귀엽다.', '저건 아까 그거랑 다르게 생겼다. 왜 조금씩 디자인이 다르지?', '와 이건 정말 예쁘다. 떼어다가 식탁등으로 쓰고 싶다.'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걸었어. 여행 중에는 이렇게 사소한 것들도 즐거움이 될 수 있구나. 다시 깨달았지.
종소리를 들으며 도착한 로센보르 궁전 (Rosenborg Slot)이야. 나는 사실 궁전이나 교회는 굉장히 흥미가 없는 편이거든, 보통 이런 궁전들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하잖아. 굉장한 저질 체력의 소유자인 난 당연히 건물을 다 둘러볼 수 없지. 그래서 어느 시점이 지나면 (= 입구를 지나온 지 30분 정도 지나면) 그 방이 그 방 같고, 그 건물이 그 건물 같고, 다리 아파 죽겠고 출구는 어디 있는지 궁금하고 뭐 그런 식이랄까. 문제는 그러고 나오면 뭔가 되게 끝까지 해내지 못한 거 같아서 기분이 별로란 말이지. 누군가 나타나서 '넌 정말 불량 관광객이야!'하고 이마에 '불량 관광객' 도장을 꽝 찍을 것만 같달까.
근데 여긴 막상 와보니까 작고 아담한 것이 꼭 동화에 나오는 궁전 같아 조금 마음에 든다. 로센보르 궁전은 1606년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 국왕에 의해 건설되어 거의 90년 간 왕실 가족들의 여름 궁전으로 이용된 곳이야. 그리고 이곳은 궁전만큼이나 정원이 유명하지. 성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 곳곳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미들 덕분에 '장미의 성'이라고 불린다고도 하네. '여름 궁전'이나 '장미의 성' 이라니. 아침 드라마 제목 같다. 뭐라고? 시끄럽다고? 알았어어어어......
티켓을 사서 내부에 들어와 처음 한 생각은 '뭐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하고 살았을까.' 였어. 난 이런 건물을 보면 감탄이나 놀라움보다는 피로와 의아함이 드는 것 같아. 유럽의 궁전들을 보면 아 이건 너무 정신없는 거 아닌가, 싶어. 단순한 삶을 지향하는 미니멀리리스트가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서 크리스티안 4세에게 '당신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 빼고 다 버리세요.'라고 할 것 같아. 그럼 국왕은 뭐라고 대답하려나? '닥쳐라! 그럼 일단 네 놈부터 여기서 끌어내야겠다.'라고 하려나.
이런 쓸데없는 공상을 하면서 슬렁슬렁 거의 마지막 방인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들어섰는데, 직원으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뭔가 정리를 하고 있다가 우리를 발견하더니 다급하게 손을 휘두르며 말하는 거야. 너네 여기서 뭐하냐고, 지하에 있는 보물 아직 안 봤냐고, 지금 당장 빨리 뛰어내려 가라고, 곧 문 닫을 시간이라고!
우리는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 말 잘 듣는 학생들처럼 냅다 뛰기 시작했어. 엄마는 '엄마 무릎도 안 좋은데, 이 돌계단을 뛰어내려오면 관절 박살 날 텐데...' 걱정하며 자꾸 뒤돌아 보는 내게 "달려! 엄마 잘 가고 있어!" 하고는 열심히 따라 오더라. 그렇게 헐레벌떡 보물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그곳에 있는 직원들도 시계를 가리키며 얼마 안 남았으니 빨리 둘러보라고 알려주더라고.
솔직히 거기서 뭘 봤는지도 모르겠고. 덴마크 왕실의 번쩍이는 보물들이 나랑 너무 상관없으니까 와닿지 않더라. 눈 앞에 뭐가 막 보이는데 그냥 눈에서 이미지로 흩어지고 아무 감흥이 없었어. 엄마랑 그냥 우와 우와 몇 번하고는 싱겁게 나왔지 뭐.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그 아무 감흥 없던 보물들을 보기 위해 엄마랑 낄낄 거리면서 계단을 뛰어내려오던 그때라고 대답할 것 같은 거야. 그때 그 순간, 우리 둘은 고등학교 단짝 친구 같았거든. 쉬는 시간 끝나기 전에 빨리 라면 먹고 교실로 돌아오려고 복도를 달려 계단을 뛰어내려 가는 것 같은 느낌. 그게 그렇게 좋더라 나는.
엄마, 어쩌면 행복은 아주 작고 반짝이는 가루 같은 걸지도 몰라. 진짜 진짜 별 거 아닌 사소한 것들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거기 있는 것. 화려한 궁전이나, 진귀한 보물이 아니라 엄마랑 딸이 웃으며 달리는 순간에 환하게 빛나며 붙어있는. 어쩌면 조금은 같이 쿡쿡, 하고 웃어주었을지도 모를, 그런 신기한 가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