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상담해주는 엄마

by 김별


엄마,

엄마랑 남자 이야기하는 거 완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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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이렇게 함께 여행하면서 말이야. 여긴 코펜하겐을 대표하는 관광지 뉘 하운(Nyhavn)이야. 뉘 하운은 덴마크어로 "새로운 항구"를 뜻한대. 1670년부터 3년 동안 크리스티안 5세에 의해 건설된 곳인데 수많은 화물선과 어선들이 이곳을 오갔대. 지금은 꼭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집처럼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선원과 항구 노동자들이 술 마시고 매춘을 했던 꽤 하드코어한 유흥가였던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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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선원과 항구 노동자들의 자리를 관광객이 대신하고 있어. 여행 오기 전에 사진이나 엽서로 봤을 땐 '이야 여긴 꼭 가봐야 해!' 하면서 눈을 반짝일 정도로 아기자기한 동화 속 세상이었는데... 덴마크를 대표하는 동화 작가 안데르센도 여기 살았다고 하고 말이야. 근데 막상 와보니까 건물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 여기가 명동이나 홍대랑 뭐가 다른 건가 싶더라. 세계 어디를 가나 사진은 사진일 뿐, 유명한 관광지는 기대 이하인 경우가 많은 것 같아. 하긴.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엽서니 동화니 그런 풍경을 기대한 내가 과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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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든 그래서... 뉘하운 대충 둘러본 후에는 바로 "에라이 밥이나 먹고 빨리 가자!"가 되어버렸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빈자리가 있는 레스토랑을 찾는 일도 쉽지 않았어. 인파를 헤치고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지. 거의 모든 테이블이 길에 나와 있어서 그런지 더 정신이 나빌레라인 것 같아. 왜 을지로 만선 호프 있는 노가리 골목 있잖아... 거기 유럽 버전인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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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갈 곳 없던 엉덩이 붙일 곳 찾은 게 어디냐."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메뉴판을 신중히 탐색하더니 피시 앤 칩스를 골랐어. 많이 들어 봤는데, 먹어본 적은 없어서 도전해 보고 싶었대. 처음 보는 메뉴,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을 위주로 고르는 엄마와 달리 나는 안전하게 참치 샐러드를 시켰어. 뭔가 혼란한 바깥세상과 달리 내 몸속은 가볍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풀이 코끼리만큼 나왔네? 게다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짜다.


하아... 이럴 땐 뭐다? 맥주지! 덴마크니까? 칼스버그! 지나치게 쓰거나 무겁지 않아 샐러드와 함께 먹기 딱 좋은 칼스버그란 말이지~아아 맥주의 산뜻한 청량감 덕분에 입 안에 남아있던 짠기가 퐁퐁, 방울 터지듯 사라져 버린다. 기분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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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도 마셨겠다, 기분도 좋아졌겠다 이럴 때 제일 좋은 안주는 (물론 샐러드도 좋지만) 남자 이야기지.


난 아주 어릴 때부터 남자 친구가 생기면 거의 실시간으로 엄마에게 말했잖아. 그래서 남자 친구가 생긴 걸 부모님께 비밀로 하는 친구들이 신기했어. 그 친구들은 미주알고주알 엄마에게 연애 상담하는 내가 신기했겠지만.


아마 그 친구들이 내가 남자 친구랑 헤어지기라도 하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엄마, 나 차였어~ 어헝~"하면서 울고불고 거실에 퍼질러 앉아 엄마랑 같이 소주 마시면서 '그 새끼' 욕을 실컷 하는 걸 봤으면 정말 놀랐을 거야. 그러다 엄마가 내 편을 안 들어주면 "엄마는 남자 아빠 한 명 밖에 안 만나봤잖아! 연애도 별로 못 해봤으면서 엄마가 뭘 알아!"하고 패악을 부리는 날 보면 눈알이 눈 밖으로 튀어나왔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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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친구처럼 지내왔기 때문일까.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남자 이야기를 하는 모녀가 되었어.


특히 오늘처럼 맥주 한 잔 기울이는 날에는! 밥을 다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수다가 끝나지 않지. 엄마는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인지.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는지. 자박자박 천천히 걷는 걸음처럼 이야기했어. 그럼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알았다. 알았다. 꼭 그런 사람 만나겠다. 하고 꾹꾹 눌러 딛는 발자국처럼 대답했지. 딸이 좋은 사랑을 만나 행복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 때문일까, 내내 머리를 헝클이는 세찬 바닷바람이 하나도 차갑지 않게 느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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