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다 받아주니까

by 김별


엄마,

난 가끔 스스로에게 놀라.


DSC09281.JPG


너무 못돼서. 그것도 엄마한테만.


파리로 가기 위해 도착한 공항에서 우린 뭐 때문에 또 말다툼을 했어. (휴, 지나고 나니 이유도 기억 안 나는 사소한 거였지만...) 잔뜩 골이 난 나는 입국 수속을 받기 위해 한 방향으로 걷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속으로 빠르게 걸어서 엄마와의 거리를 벌렸어.


걸음이 느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엄마를 저 멀리 내버려 두고 혼자서 앞으로 가버린 거야. 분노를 동력 삼아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속도가 난 게 아니라, 일부러 그랬어. 엄마가 미워서. 낯선 곳에서 내가 사라지면 당황할 엄마를 알면서. 일부러.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엄마한테만 못되게 굴까.


IMG_0977.JPG


선명 스님의 <다음 생엔 엄마의 엄마로 태어날게>라는 책을 읽은 적 있거든. 엄마와 딸에서 주지스님과 스님으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재미있는 건 두 사람이 스승과 제자일 때와 엄마와 딸일 때 모습이 마구 엉켜있다는 거야. 나는 스님이면 뭔가 범인보다 마음공부를 많이 해서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딸인 선명 스님도 엄마인 주지스님에게 엄청 투정도 부리고 괜히 밥 안 먹는다고 심술도 부리고 그러더라.


그러다가 어느 날 주지스님 때문에 힘들다고 토굴에 계신 큰스님에게 전화해서 막 고자질을 해. 그리고 '주지스님이 이랬고요, 저랬고요, 이러셨어요.' 하며 실컷 엄마 흉을 보는 스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많이 싸워라. 힘이 있으니까 싸우는 거다.
많이 싸워야 죽기 전에 정도 더 드는 것이고.


그 말을 들은 스님은 마음이 찡해져서 다시 생각해.


주지스님이 나이가 더 들고 힘이 더 빠지면 그때는 싸울 힘도 없으시겠지요. 허공에 대고 투정을 부릴 수도, 벽을 바라보고 심술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인데, 나를 받아주는 주지스님이 계시니 내가 호기를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주지스님이 나이 들고 약해져 가는 모습은 보지 못한 채, 나는 몹시 억울한 사람 역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계시는 것이 안 계신 것보다 좋은 줄만 알아라."

안 계시다는 것.
그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데
겁도 없이 심술을 부렸던 것입니다.


나는 깨달았지. 결국 딸이 엄마한테 못되게 굴 수 있는 이유는 엄마가 받아주기 때문에. 엄마는 받아줄 걸 아니까. 그래서 호기를 부리는 거야. 엄마가 곁에 없다는 것, 그걸 잠깐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주제에. 겁도 없이 말이야.


IMG_0490.JPG


결국 그렇게 셀프로 반성을 한 바가지 하고 미안한 마음에 뒤를 돌아봤는데 엄마가 안 보이는 거야! '엄마?' 가슴이 덜컹해서 걸음을 돌려 다시 오던 길을 빠르게 되짚어갔어. 혹시 길 잃어버렸으면 어쩌나, 속상한 마음에 어디 주저앉아서 울고 있으면 어쩌나, 김별 이 미친년아, 이 천하에 못된 년아, 하면서 허둥지둥 그렇게 엄마를 찾는데 엄마가 저 멀리서 생각보다 태연한 얼굴로 걸어오고 있는 거야.


그 모습을 보는데 맥이 확 풀리면서 지금까지 가슴 졸인 게 또 억울하더라. (아이고 이 인간아...) 그래서 미안하다고 안 하고 (얼씨구?)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엄마 여권 어딨어?" 이러고는 괜히 엄마 여권을 뒤적거리고 비행기 표를 넣어서 돌려줬어. 엄마도 별 말없이 여권을 받아 들고는 "줄이 왜 이렇게 기냐~"하고는 내 옆으로 와서 같이 걸었지.


IMG_0495.JPG


엄마는 내 심술궂은 속마음을 알고 있었을까? 내가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 그렇게 덤덤한 얼굴로 씩씩하게 걸어왔을까. 내가 기껏해야 조금 가다가 다시 돌아올 걸 잘 알아서였을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냥 엄마랑 이렇게 무사히 파리에 도착해서 같이 거울 셀카 찍으며 깔깔거릴 수 있어서 좋아. 시인 신달자는 그녀의 책 <엄마와 딸>에서 엄마와 딸을 '서로 쳐다보고 한 번만 웃어도 10년 화가 풀리는 사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말 그렇다. 내가 언제 엄마한테 화냈는지 왜 화냈는지 기억도 안 나네. 엄마도 그렇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제와 하는 이야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