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도착해서 그만 싸우자고 한 게 무색하게 엄마와 나는 방금 또 싸웠어. 전에 같이 푸껫 갔을 때도 같은 이유로 싸웠었는데 이번에도 그거였지. 여행에서 꼭 한 번은 이걸로 싸우는 것 같다.
문제의 그것은 바로바로... 길 찾기야!
오늘 아침 우리는 거의 2주 만에 한국 식당에 가기로 결정했어. 이번 유럽 여행의 첫 도시였던 벨기에 브뤼셀에서 가고 처음이니까 진짜 오래 참은 거지. 사실 며칠 후면 한국에 가지만... 그 며칠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눈뜨자마자 폭풍 구글링을 해서 후기가 괜찮은 한국 식당을 찾았어. 숙소와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버스를 타고 가면서 겸사겸사 시내 구경을 하면 되니까 고민 없이 출발했지.
버스에서의 우린 참 다정한 모녀였어. 깨가 쏟아지게 알콩달콩하며 무사히 내려야 할 정류장에 내리긴 했는데... 그 뒤로 길을 헤매기 시작한 거야. 사실 난 방향 감각 제로인 심각한 길치이고 엄마는 나보다 살짝 더 나은 편이거든. 그럼 내가 엄마에게 의지하면 될 것 같잖아. 근데 그게 안 되는 거야.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파리이기 때문이었지.
구글 맵과 길가에 있는 안내판에 의지해 길을 찾는 상황에서, 엄마보다 휴대폰 사용과 영어에 익숙한 내가 정보를 보고 파악하는 게 용이했던 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길치 주제에) 앞장서게 된 거지. "엄마, 이쪽이야!" 하고 말이야.
그럼 엄마가 나를 믿고 따라와 주면 되는데, 엄마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어. 왜냐, 엄마는 내가 길치인 걸 알고 있거든. 그래서 내가 저쪽으로 가자고 하면 엄마는 잠깐만 있어보라고 하고 계속 지도를 보거나, 나를 따라 걸으면서도 그쪽이 아닌 것 같다고 끈질기게 내게 말하는 거야. 그럼 당연히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지.
한참을 걸어도 목적지는 나타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감정이 쌓이기 시작했어. '참아야 하느니라, 참자, 참자...' 하면서도 표정이 차갑게 굳어버리고, 나름 컨트롤한다고 하는데도 서로를 향해 던지는 말에는 가시가 가득해져.
이번 싸움은 분노를 펑펑 터뜨리는 싸움은 아니었지만,싸늘한 침묵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격렬했던 것 같아. 피 튀기는 무언의 공공칠빵 같은 느낌이랄까.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거나, 겉으로는 "그래 알았어. 그쪽으로 가보자."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속으로 엄청 열 받아 있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었지. 그걸 꾹 참고 있는 걸 온몸으로 뿜어내니까 말이야.
엄마 그거 알아? 문어가 감정에 따라 몸의 무늬와 색을 바꾼다는 거? 아마 우리 둘이 문어였다면 분명 엄마는 빨간 불꽃 모양을 만들고 있었을 테고, 내 몸에선 아주 어두운 잿빛의 구름이 흐르고 있었을 거야. 부르르~ 쿠르르~ 하면서.분노의 문어 두 마리는 그렇게 꾸물꾸물 무거워진 몸뚱이를 질질 끌며 하염없이 파리의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어.
그러다 어느덧 숙소에서 나온 지 1시간이 넘어가고 슬슬 피로와 짜증이 몰려와 '아휴 그냥 포기하고 아무 곳에나 들어갈까?'하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눈앞에 짠!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한국 식당이 나타났어! 그것도 내가 한 번 가보자고 우긴 골목에서 말이야! 솔직히 나도 알아. 내가 길을 잘 알아서 식당을 찾은 게 아니라 순전히 운이었다는 걸.
나는 엄마가 기분이 좀 상해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하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아이고 뭐야? 여기다! 오오 나도 진짜 이 골목에 있을 줄 몰랐는데. 깜짝 놀랐네. 하하하."하고 말했어. 엄마도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거야. 비록 영혼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와아 별이가 찾았네. 엄마는 여기 없을 줄 알았는데."하고 말해주었으니까. 뭐 푸껫에선 둘이 길에서 소리 지르고 울고 불면서 싸웠는데, 이 정도 마무리면 장족의 발전이지.
그런데 그렇게 나름 훈훈하게 식당에 잘 들어와 얼큰한 순두부찌개랑 육개장까지 시켜놓고 사이좋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엄마가 우는 거야. 그것도 서럽디 서럽게.
아니 내가 막 시비를 건 게 아니거든? 그냥 차분하게,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봤단 말이야. 이렇게.
"엄마, 근데 왜 내가 지도를 보고 '이쪽으로 가면 된다'고 하면 들은 척도 안 하고 계속 지도를 봐?"
그랬더니 엄마가 뭐라고 했는 줄 알아?
그게... 내가 너를 못 믿는 거 같아. 있잖아, 나는 네가... 못 미더워.
아니 이건 너무 솔직하잖아! 나는 엄마에게 다시 물었어.
"허어...? 아니 왜? 왜 나를 못 믿어?"
"......."
엄마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망설였어. 그러다가 입을 열었지.
"너는 내 눈에는 아직도 어린 애고, 나는 네 엄마니까. 네가 하는 일은 다 조금씩 어설퍼 보이고 못 미더워... 내가 다 해줘야 할 것 같고. 해주고 싶고. 언제나 길을 제시해주는 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해 와서 그런 거 같아. 그런데..."
"그런데?"
"아까 네가 지도를 보고 거의 바로 '저쪽이네, 가자!' 했잖아. 그때 엄마도 지도 보고 있었는데... 글씨도 너무 작아서 안 보이고, 머리도 예전처럼 빨리 안 돌아가는 느낌이 나는 거야. 너는 이미 다 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는데, 나는 아직 다 보지도 못했거든. 그래서..."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어. 그리고 내가 많이 늙어버린 것 같아서 슬펐어."
엄마는 여기까지 말하고 울기 시작했어.
"네가 엄마가 다 볼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면 좋겠는데, 그냥 막 다 빨리빨리 가자고 재촉하니까..."
수저 아래 깔린 티슈를 집어 들고, 끅끅거리며 우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어. 응 그랬구나. 나한테 기다려 달라고 말하자니 자존심 강한 엄마 성격에 그건 또 하기 싫고, 그렇다고 '나만 따라와!'하고 앞장서자니 사실은 잘 몰라서 속상하고 그랬나 보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아이고 그만 울어. 맛있는 거 앞에 두고 왜 초상집이야. 기껏 힘들게 찾아와서 시킨 음식들 다 식겠다. 알았어, 미안해. 이거 다 먹고 숙소로 돌아갈 땐 엄마가 앞장서! 혹시 헤매도 내가 기다려 줄게, 믿고 따라갈게. 뭐 설마 오늘 안에는 가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