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
그건 곁에 있어주는 거야. 많은 걸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같은 공간에 있기만 해도 충분하지. 사랑하는 존재를 혼자 있지 않게 하려는 노력만큼 아름다운 건 없어.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이냐고? 그건 우리가 묵었던 파리 숙소의 이름 모를 강아지 때문이야.
파리의 숙소는 여러모로 최악이었어. 사실 이 숙소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으로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곳이야.
1) 침실 창문에서 에펠탑이 보일 것.
- 에펠탑이 뭐라고. 둘 다 파리가 처음이라 일종의 로망 같은 거였어.
2) 에어비앤비 호스트와 함께 생활하는 조건일 것.
- 여행 내내 아파트 전체를 빌려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호스트가 함께 생활하는 곳으로 선택했어. 내가 엄마 없이 혼자 여행할 때, 늘 좋은 호스트를 만나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기 때문에 엄마에게도 그런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어.
3) 엘리베이터가 있을 것.
- 이건 엄마의 무릎 건강을 위해 언제나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야. 유럽 구시가지에 위치한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 없는 곳이 너무 많아서 항상 호스트에게 따로 연락해서 확인해야 했어.
제법 많은 시간을 들여 고심 끝에 결정했기 때문일까, 기대를 많이 했는데... 첫인상부터 참 별로더라고. 우선 약속한 시간에 숙소에 도착했는데 호스트가 연락 두절이었어. 당연히 문은 잠겨있었지. 전화를 계속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그렇게 거의 1시간을 길바닥에서 서서 사색이 되어가고 있을 때쯤 저 멀리서 한 소년이 달려왔어.
만화 둘리에 나오는 마이콜 같은 보글보글한 머리에 깡마른 남자아이는 대충 14~5살 정도로 보였어. 그 아이는 우리를 보더니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짧은 단어들을 나열해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는데, 일단 자기는 호스트 아들의 친구라는 거야. 호스트, 아들의, 친구? 대충 들어보니 호스트가 너무 바빠서 대신 왔다는 거 같았어. 아니 그럼 전화로 설명을 하던가, 메시지에 답이라도 하던가, 진짜 경우 없는 인간이잖아! 후우 나는 기분이 나빴지만 갑자기 친구 엄마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온 죄 없는 아이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지.
'어쩔 수 없지 뭐. 여행 중에 흔히 일어나는 에피소드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겨우 마음을 다잡고 열쇠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왔는데... 세상에 이 사랑스러운 생명이 우리를 반겨주는 거야. 혼자 있었던 시간이 오래였는지 요요 귀여운 흰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회색에 가까운) 강아지는 우리가 무척이나 낯선 사람인데도 경계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어. 그저 누군가 와주었다는 게 반갑고, 반가운 듯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지. 꼬리가 프로펠러가 되어 하늘로 동동 떠오를 것만 같았어.
그리곤 엄마와 내가 집에 있는 동안 우리를 계속 졸졸 따라다녔어. 내가 자리에 앉으면 어느새 발밑에 앉아 자리를 잡았지. 꼭 자기 몸의 어딘가를 내게 붙이고 말이야. 그러다가 내가 아주 조금만 자세를 바꾸어도 일어나서 다시 자기 몸을 내게 붙였어. 이 아이만의 방식으로 아주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내게 애정을 표현하는 거야. 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작고 작은 몸에서 전해오는 희미한 온기가 발끝부터 서서히 번져 어느새 내 가슴까지 따뜻하게 해주는 그 느낌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이었어. 우린 문 밖에서 동동거리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이 작은 천사의 말랑한 위로 덕분에 깨끗하게 날려버릴 수 있었지.
그 후, 밤이 되어서야 도착한 호스트가 거실은 자기 작업실이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 우리가 머물던 방에 있는 두 개의 문 중에 거실로 통하는 문을 사용하지 않으면 화장실을 통과해 복도로 지날 수밖에 없는데... 화장실을 누군가 쓰고 있으면 꼼짝없이 갇히는 신세가 된다는 것. 그래서 엄마가 '에펠탑이 보이는 감옥살이가 따로 없다'라고 말해 나를 허탈하게 만든 것... 등등 이 숙소의 수도 없이 많았던 문제점은 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자.
그 모든 단점을 커버할 만큼 이 아이의 존재감이 컸으니까 말이야. 우리가 집 안으로 들고 날 때마다 늘 혼자 있던, 이른 아침에 나가고 늦은 밤에 오는 주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꼬질꼬질 딱한 아이. 이 녀석을 보며 나는 집에서 아빠랑 같이 나랑 기다리고 있을 내 강아지들을 떠올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일자리를 구하고 출퇴근을 하기 시작하면 우리 강아지들도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겠지... 생각하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벌써 죄인이 된 기분이야.
호스트의 인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일까, 처음에는 '아니 이 여자는 애를 하루 종일 혼자 두고. 목욕이라도 좀 시켜주지 이게 뭐야. 산책을 시키긴 하는 거냐?' 하면서 속으로 욕을 했어. 그러다가 문득... 어쩌면 그녀도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닐 거라고, 그냥 사는 게 숨막히게 바빠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그래, 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거겠지. 남 욕하지 말고 그 시간에 지금 내게 꼬리를 흔드는 이 아이를 한 번이라도 더 안아주자. 그리고 한국에 돌아가서 나나 잘 하자.' 싶기도 하더라.
엄마, 내가 말했었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곁에 있어주는 거라고. 아마 이 집의 주인도 이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어주기 위해 산더미처럼 쌓인 일들을 정글을 헤치며 가시나무를 잘라내는 원주민의 마음으로 바삐 쳐내며 집까지 달려오는지도 몰라. 늘 혼자 있는 이 아이를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잠시라도 같이 있어주기를 바라면서 에어비앤비를 시작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럼 너무 슬프니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 이렇게 예쁜 아이는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분명 그럴 거라고 말이야.
그렇지 아가? 이모가 잘 모르면서 네 엄마 욕해서 미안해.
혼자서 많이 심심했지. 너만 괜찮으면 내가 조금 더 같이 있다가 나가도 될까?
있잖아, 아무래도 파리 여행을 마치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에펠탑도 개선문도 아니고 너일 것 같아.
존재만으로도 이미 사랑 그 자체인 바로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