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돌이 지나면서 우리 아이에게는 3개의 키워드로 이루어진 좌우명이 생겼다.
엄마랑, 밖에서, 놀 거야!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할 때 그는 행복하다. 한 가지 조건이라도 부족한 상황은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원하는 바를 얻을 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투쟁한다.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해 땀이 줄줄 흘러도 밖으로, 밖으로, 무조건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 때문에 요즘 나는 부쩍 지친다. 어제는 아이가 하원한 오후 3시 반부터 남편이 퇴근한 8시 반까지 5시간 동안 아이와 온몸으로 부대꼈더니 다시 만난 남편 얼굴만 봐도 눈물이 핑 돌았다. ‘할렐루야! 이제 바통 터치하고 좀 쉬어야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만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는 금세 물거품이 되었다. 아이는 죽으나 사나 일거수일투족 나만 잡고 늘어지고, 남편은 나의 간절한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여유가 만만하게 본인의 일을 했다. 사실 남편도 퇴근 후에 한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내 마음이 메말라있으니 그냥 물 마시는 모습만 봐도 화가 났다. ‘나는 물 한 잔도 체할 정도로 허겁지겁 마셔야 하는데, 저 사람은 아주 혼자 여유작작이네...’ 이런 식으로 생각이 흘렀다.
그러다 결국 양치하는 시간에 사건(?)은 일어났다. 아이는 아빠랑 좀 하라는 나의 애절한 소호를 들은 척도 안 하고 양치도 나와 하겠다며 떼를 썼고, 애가 울고불고 뒤집어지면 결국 또 달래느라 힘든 건 나니까… 그냥 서둘러 아이 이를 닦아주고 변기에 앉아 급하게 내 이를 닦기 시작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치약을 짜서 퍼먹고 있는 아이를 데려가 옷이라도 갈아입혀주면 좋겠는데 혼자 거실 화장실에서 여유 넘치게 양치를 하던 남편은 기척도 없다. 내 입은 어느새 매운 거품으로 가득 찼고 아이는 그걸 뱉으려는 내 입으로 달려들어 계속 장난을 쳤다. 순간 내 안에 어딘가에서 이성의 끝이 토도독, 하고 끊어지려 하는 걸 느꼈다.
“여보! 뭐해? 나도 제발 양치 좀 하자!”
날선 내 목소리에 후다닥 달려온 남편은 당연히 전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가 평소와 달리 굳은 내 얼굴을 보고는 더 후다닥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아빠 손에 끌려나가는 아이는 방금까지 나랑 있었는데도 “엄마가 보고싶어~어헝헝~”하고 울었다. 아이가 그대로 다시 내게 올까 봐 나는 서둘러 화장실 문을 잠그고 변기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양치를 마치고 조금 더 거기 앉아서 쉬었다.
그러고 있자니 언젠가 TV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25년 차 배우이자 가수 강성연이 두 아이를 재우고 화장실에 앉아 남편이 먹다 남긴 김빠진 맥주를 마시며 14시간 만에 처음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휴식을 취하던 모습. 그때 화면에 나온 자막은 ‘화장실 문 뒤편에 마련한 이곳이 성연의 유일한 힐링 공간’이었다.
육아노동자의 휴게실은 진정 화장실일 수밖에 없는가! 나와 그녀의 처지가 너무 짠해서 살짝 우울해지려는 순간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스물다섯 신입 사원이었던 내가 을지로 상공회의소 5층에 있는 화장실 맨 끝 칸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 ‘아후 내 딸이 그때 그 팀장 보다 더 무섭다…’ 하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터졌다. 2009년의 나는 12년 뒤 내가 또 화장실에 숨어 쉬고 있을 줄 꿈도 못 꿨겠지. 허허허.
나의 첫 직장은 정말 들어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었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당연히 우리 아이도 우리 부부가 진짜 간절히 기다린 끝에 만난 기적 같은 선물이었다. 직장인이 되는 것도, 엄마가 되는 것도 절대 쉽지 않지만 나를 성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똑같구나 싶었다.
그래, 화장실에서라도 쉴 수 있는 게 어디냐. 문을 안에서 잠글 수 있는 게 어디냐. 다시 초긍정의 파워 게이지가 올랐다. 우울을 밀어냈다. 이대로 화장실에서 혼자 내일까지 있고 싶은 마음을 떨쳤다. 결연한 얼굴로 변기에서 일어섰다.
나가자,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밖으로!
나는, 짝! 할 수, 짝! 있다, 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