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속에 숨어있던 것들
누구나 청소를 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잊고 있던 물건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지난번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종이쪽지들과 마주했다.
내 화장대 위에는 뚜껑 달린 라탄 바구니가 있고 그 속에는 오래 간직하고 싶은 서류들이 들어있다.
바구니는 뚜껑이 달려있다는 이유로 매번 정리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그날은 그 바구니도 좀 정리하고 싶었다.
바구니를 뒤집어서 내용물들을 방바닥에 홀라당 쏟아부었다.
오랜만에 빛을 본 종이쪽지들이다.
종이들을 하나하나 골라내다가 작은 봉투에 시선이 꽂혔다.
`이건 뭐지?`
열어보니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에 썼던 서약서 쪽지가 들어있다.
순간 푸하하하 크하하하 웃음보가 터졌다.
엄마의 독촉인지 다짐인지 초등학생이 쓴 글씨체는 삐뚤어져 갈길이 휘청거렸지만,
빨간펜을 밀리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이다.
어설픈 사인까지 곁들인 쪽지는 27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놓고 있다.
오로지 학교 앞 문방구에 설치된 오락게임이 생의 유일한 낙이었던 아들.
학교만 파하면 어김없이 오락기 앞에 앉아서 학생 신분을 던져버리고 숙제고 뭐고 다 필요 없다로
일관했다.
그랬으니 내 눈이 부드러울 리 만무하다.
이것도 아들이 엄마의 도끼눈에 못 이겨 써낸 글인 게 분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를 떠나 다른 것에 눈독을 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 고약한 풍토 앞에서 아들은 덜덜 떨면서 서약서를 썼을 테다.
서약서를 근거로 공부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경우 곧 엄마의 철퇴를 각오하면서.
서약서는 부동산 계약서처럼 곱게 간직하고 또 간직하여 여기까지 왔다.
버리지 말고 이담에 보여줘야지.
이사할 때도 이것만은 버리지 않았다.
간직은 했으나 잊고 있었던 어린 날의 서약서가 정리를 통해 다시 살아났다.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이걸 본다면 아들은 멋쩍게 웃으면서 종이를 찢어버릴 것만 같다.
그대로 몰래 간직하기로 했다.
손녀들이 더 커서 학교에 가고 제 아빠가 이 글을 썼던 나이가 되면 보여줄 생각이다.
아이들 반응이 어떨지.
웃을 준비를 해얄 지 울 준비를 해얄 지 퍽이나 기대된다.
그것과 함께 또 다른 종이가 묶여있었는데
그건 딸이 쓴 편지다.
결혼기념일에 머리핀, 손수건과 함께
건네준 쪽지글에서 어린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당시 하던 사업이 쫄딱 망해서 객지로 내려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막노동을 하던 시절이다.
사는 게 참으로 고달픈 시기라 아이들에게 용돈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머니가 0% 라는 대목에서 한동안 생각들이 올가닥거렸다.
이렇게 오래된 편지들을 읽고 보니 슬그머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여 각자의 삶에 충실하기까지 딸이고 아들이고
모두가 고생 많았다.
어린 뼈가 굵어지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들과,
독신주의 딸도 혼자 씩씩하게 잘 살아내고 있어 자근자근 용기를 보태고 있다.
이미 잊고 있던 오래전 사진도 툭 튀어나와 내게 말을 건넨다.
`당신도 이런 때가 있었다오.`
마흔다섯.
그 시절이 있기나 했었나 싶다.
사진은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랬던 마흔다섯 살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사람인건 분명한데 지금은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떠내려가는 시간 속에서 몰래몰래, 야금야금
부식되어 간 거다.
그녀가.
도망치는 시간은 야속했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안정권으로 이끌어 갔고 묵직한
나이를 데려다주었다.
용모를 삭히는 대신 지혜를 안겨준 거다.
허연 머리카락은 허송세월의 부산물이 아니다.
그건 분명 우리가 뼛속에 간직하고 견뎌온 인내의 덩어리 들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난 만큼의 결과를 가져다준다.
그것은 빼앗은 만큼 돌려주는 시간만의 순환이고 권리이다.
오랫동안 묵혀있던 쪽지와 사진이 과거로 잠시 나를 돌려주었다.
지나온 생을 회억 해보면 순간순간, 마디마디 어둠이 숨어들어 있었고
그 찰나들은 오늘의 성장을 견인했다.
청소를 하면서 잊고 있었던, 잃어버렸던 과거를 찾아들고
망연자실 그 시절에 내가 앉아있었다.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청춘이지만 생의 바지랑대 위에서
나는 나의 과거가 될 오늘을 편집하고 있다.
기록들을 소중히 하는 건 으깨진 것들을 다시 뭉쳐내는 힘이다.
그 힘은 더 단단한 내일을 끌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