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 기억과 추억이 머무는 곳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디에있는지 모르겠다. 숨쉬기 시작한 지 어언 27년인데, 내가 태어났다는 걸 증명할 사람은 엄마, 아빠 밖에 없다.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믿을 수밖에 없다. 나의 시간들. 그게 있기는 한 걸까.
난 사교성은 있으나 사교할 의지는 부족한 사람이다. 의심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잘 믿는 건 또 아니다. 머리가 커지고 세상사에 의심이 많아지자 지나간 내 시간들이 궁금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대각선 뒤에 앉던 피부가 까만 편이었던 여자애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그때 난 분명 초등학생이 연애를 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섞인 마음으로 그 친구의 순수한 고백을 거절했다. 그 기억뿐만이 아니라 느낌마저도 생생하다. 그런데 그 시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걸까. 지금은 분명 내가 기억하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없었던 사실이 된다. 누군가 해킹할 위험은 없지만, 메모리카드가 손상되지 않을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 기억들이 사라질까 두렵다.
「반지의 제왕」의 빌보 베긴스가 엘프와 함께 불멸의 땅 '아만'으로 떠난 것처럼 내 기억들이 아만과 비슷한 그 영역에 있는 게 아닐까.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자 믿음의 영역은 그래서 마치 '13월'같다. 「반지의 제왕」에서 뿐만 아니라 「해리포터시리즈」의 9와 4분의 3 승강장이 그렇고황금의 도시 '엘도라도'와 '아틀란티스'의 전설 따위도 비슷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있지도 않지만 어딘가에 우리가 모르는 공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올해만해도 신해철이 떠났고, 레이디스코드의 은비와 리세가 떠났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들에 관한 기사들은 그들이 이미 지상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려주지만, 역설적으로 그 기사들만 없다면 누가 그들이 떠났음을 알 수 있을까. 아직도 동네 카페에서는 가끔씩 레이디스 코드의 I'm fine thankyou를 틀어주고 단골 술집에서는 신해철의 '일상으로의 초대'를 종종 튼다. 그뿐인가, 아마도 무한궤도의 '그대에게'는 매년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의 응원곡으로 울려퍼질 것이다. 그들이 아직도 떠났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난 철없는 아이처럼 13월의 어딘가에 혹은 불멸의 땅 어딘가에서 그들이 함께 있지 않을까하는 위로 섞인 상상을 하고 있다.
2년 반 가까이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매일 같이 붙어다니던 그 여자와 추억이 많았기 때문에 헤어지고 나서 더 힘들었다. 헤어지는 이유가 무엇이었든, 가장 나를 힘들게했던 건 이제 함께 시간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함께하던 시간들은 생생한데 곁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힘들어했다. 각자의 삶을 사는 지금은 시간이 올바르게 흘러가지만 그때는 분명 시간은 느리게 가기도 했고 가지 않기도 했다. 시간은 절대적인 속도로 흘러간다지만, 절대적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시간의 속도도 상대적인데 겨우 13월이라는 게 없을까.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어딘가에는 존재하고 있었으면 한다. 그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정말 어딘가에 고스란히 있었으면 한다. 엘도라도처럼 아틀란티스처럼지구 어딘가에 숨어있지만 내가 못 찾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렇지 않다면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내 삶이 너무 각박하다. 성공한 어른들과자기계발서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열심히 사는 거라고 하지만, 나에겐 과거의 추억없이 현재를 버티긴 힘들다. 나의 역사를 지켜내기 위해 현재를살고 싶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미래보다는 이젠 내 것이 된 과거를 지키고 싶다.
가출한 뒤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울면서 안아주던 그 모습이 현재를 살게 하는 순간이고, 지금은 떠나버린 강아지 은실이가 안아달라고 꼬리치던 모습이 지금을 버티는 힘이다. 그래서 내가 느꼈던 희로애락의 감정들을 힘들 때 꺼내어 보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 또 한번 끄집어내서 이야기한다. 서로의 13월을 보여준다. 각자의13월은 그래서 어딘가에 있다. 없다고 믿으면 없고 있다고 믿으면 있겠지만 난 믿어야겠다. 나의 소중한 13월 없이는 삶은 너무 각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