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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Feb 14. 2017

한국 영화가 신파성을 극복하는 법

영화 <재심> 리뷰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즐거움이라는 뜻의 이 단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시다시피 영화가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엔터테인먼트'가 단순히 즐거움만을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즐거움 속에는 슬픔, 분노, 감동 등이 있고, 그러한 다양한 감정을 종합해 관객들이 (궁극적으로)즐거움에 닿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무슨말이고하니, <도가니>를 떠올려보자. 사회고발적인 성격의 <도가니>를 아직 관람하지 못한 관객들은 그 영화가 어둡고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지만, 기꺼이 돈을 내고 분노하러 간다. <도가니>에 투자하는 시간과 돈에는 분노뿐만이 아니라 분노를 '즐기는 감정'도 포함되어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분노 뿐만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든 과하면 관객들은 쉽게 불쾌감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우린 그런 영화를 바로 '망했다'고 표현한다.


대표적으로 <연평해전>, <히말라야> 등이 그런 영화에 해당된다. 두 영화 모두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첫번째 공통점이 있으며, 관객에서 감정과잉을 불러일으켜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는 두번째 공통점이 있다. 감정 과잉이라는 것을 좀 자세히 뜯어보자면 이렇다. 주인공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시련을 겪는다(전쟁 혹은 동료의 죽음). 갑작스러운 시련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극 초반에는 세상 이렇게 행복할 수 없는 장면들만 주구장창 나열된다. 안타까운 장면들을 계속 보여주다가 끝에는 주인공의 희생이나 용기로 마무리.


이런 전개 방식은 두 영화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시련 이후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이 주는 감동은 신파적이라고 비판받는 한국 영화의 단골 플롯이다(우리가 파블로프의 개인가). 하지만 영화가 가장 대중적인 취미가 된 대한민국에서 십년 전과 유사한 플롯으로 관객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태도는 굉장히 게으른 태도라 할 수 있다. 관객의 눈은 이미 높아졌는데, 몇몇 영화 제작자들은 아직도 과거에 머물러있다.


유사하게, 주인공들이 위기에 처하고 서로 갈등을 겪다가 결국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치는 플롯의 영화는 제목만 바뀌었지 매달 한 편씩은 꼭 나오고 있다. 지난 1월에는 남한의 형사와 북한의 형사가 그랬고(<공조>), 그 전 달에는 사기꾼과 경찰이 그랬다(<마스터>). 물론, 감동이라는 코드는 장르를 떠나 필수적인 요소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정형화된 패턴은 전체적인 한국 영화의 질적 하락을 부른다. 그런 점에서 <재심>의 차별성은 눈여겨볼만하다. 신파성 짙은 휴먼드라마 중 의미있는 변신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울면 관객도 따라 운다는 공식을 김태윤 감독이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현우는 울지 않는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쓴 소년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실화 자체가 주는 큰 먹먹함 때문일까, 감독은 그 감정을 쉽게 조종하지 않는다. 키우지도 않고 누르지도 않는다. 오히려 감독은 극 초반부터 현우(강하늘)가 범인이 되고 재판을 받는 장면을 스피드하게 전개시킨다. 행복에서 좌절로 떨어뜨려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태우려하지 않는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미 알고 있는 관객들은 어느 정도의 관전 포인트를 예상할 수 있다. 사법당국에 대한 비판, 정의로운 변호사, 억울한 시민의 누명 벗기 이렇게 세 가지 정도다. 김태윤 감독이 그 세 가지 기대에만 부응해 버렸다면 <재심>은 그저 그런 영화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기억나는 사건 당일을 보여주는 연출 방식이나 한 명씩 나타나는 증인과 증거는 신파적으로 흘러가기 쉬운 실화 영화에 추리 요소를 넣으며, 뻔하지 않게 만들었다.


많은 휴먼드라마가 어떤 마지막 한 씬을 위해 모든 이야기가 전력질주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과는 반대로 <재심>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도 인상 깊다. 위에서 언급했듯, 높게 쌓여만 가는 수직의 영화가 있는 반면, 넓게 퍼지는 수평의 영화가 있다. <재심> 이전에 많은 실화 영화가 주인공을 높이 올렸다가 추락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면, 김태윤 감독은 퍼즐을 넓게 퍼뜨려놓고 조금씩 퍼즐을 맞춰가는 방식의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


정우와 강하늘은 최고의 캐스팅이었다.


그렇게 뻔하지 않은 방식이 <재심>의 미덕이다. 현우(강하늘)는 변호사 준영(정우)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태도 이후에 준영은 현우를 완벽하게 믿지는 못하지만 극 초반부터 이미 의심을 조금씩 걷으며 믿기 시작한다. 준영과 현우의 유대감은 처음부터 쌓이기 시작하고 그것은 중간에 조금씩 흔들릴 뿐 마지막까지 크게 변치 않는다. 아무리 영화가 '극적'이라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사실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폭발하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조금씩 쌓여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증오든. 극적이지 않아서 사실적이다.


<재심>을 칭찬했으나, 아쉬운 점도 있다. 위에서 몇번이나 언급했듯 <재심>의 미덕이 서서히 쌓여가는 감정이었기에, 그렇지 못한 몇몇 전개나 설정은 분위기를 헤쳤다. 그 몇몇 장면은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관객들을 위해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재심>이 휴먼드라마가 항상 겪어왔던 신파성을 어떻게 극복하려했는지는 극장에서 확인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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