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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Aug 20. 2016

없는 도시, 서울

영화 <서울역> 후기

"다른 건 몰라도 자식한테 서울역은 꼭 보여줄거야. 이게 현실이라고."


25살 때였나. 아직은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이라고 생각할 무렵, 그저 대학생의 티를 조금 낼 무렵. 친구에게 꽤 진지한 말을 들었다. 한쪽에는 노숙자들이, 그 건넛편에는 고층빌딩이 가득한 서울역 앞에서 말이다. 그래서 서울역에만 가면 그 말이 떠오른다.

여자친구에게 원조교제를 알선하는 남자친구

<서울역>은 <부상행>의 프리퀄이지만 <부산행>이 주는 메세지를 보다 더 묵직하게 전달한다. 연상호 감독은 '좀비보다 무서운 게 사람'이라는 의미를 전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산행>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잔인함이 드러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면, <서울역>은 인간은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잔인함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었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노숙인임을 알게되자 외면하는 사람들,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를 알선하는 남자친구, 이 세상이 너무 잔인하다기 보다는 인간이 잔인하다.

좀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폭동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노숙인 동료가 죽었다는 신고를 받고 역무원은 현장에 귀찮아하며 나가지만 죽었다는 노숙인은 사라지고 없다. 역무원들은 더운데 괜히 고생했다며 짜증을 내고는 아침에 뭐 먹을지 얘기한다. "콩국수나 먹을까" "콩국수는 어제 먹었잖아요." 밥 한 끼 먹을 수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들과 메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뒤섞여있는 곳이 서울역이다.

붉은 악마티셔츠(be the reds)를 입은 아저씨가 "이게 다 빨갱이짓 소행"이라며 다른 시민들에게 삿대질은 하는 장면은 괜찮은 농담이었다. 사회주의자의 빨간색, 붉은 악마의 빨간색, 새누리당의 빨간색. 색깔은 언제나 하나였지만 시대 배경과 쓰임에 따라 달라지는 이미지. 하지만 절대적인 사실은 '색깔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 사람이 색깔을 오남용하듯, 서울은 계속 잘못 사용되고 있다. 공간과 시간이 불균등하게 배분되는 동안 죽어가고 쓰러져가는 사람들이 누적된다. 서울에는 잘못이 없다.


<서울역>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노숙자도 아니고 좀비도 아니고 '집'이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가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오는 슬픈 대사는 집없음에 대한 변주다 . 그리고 생각한다. 집 없는 사람들이 어디 노숙자뿐인가. 대학생들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 집인가. 방이지. 원룸은 방이지, 집이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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