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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28. 2015

모두의 예술 그러나 단 한 명의 예술가

영화 <프랭크> 감상평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프랭크>는 ‘타고난 것’과 ‘타고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존의 일상은 음악이 지배하고, 프랭크의 음악은 일상을 지배했다.프랭크의 이름, FRANK. 영어로 ‘솔직한’이라는 뜻의 이 형용사는 사실 프랭크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는 모순적인 단어다. 그는 어렸을 적 정신병을 앓았다. 이때부터 프랭크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가면을 쓰기 시작했고 밥을 먹거나 씻을 때조차 가면을 벗지 않았다. 가짜는 진짜가 됐다.


가면의 프랭크, 맨얼굴의 존

가짜 얼굴을 의미하는 가면. 이것을 평생 쓰기로 결심했다는 프랭크(마이클 패스벤더)의 다짐은 다른 사람으로의 변신을 의미한다. 팔이나 다리와 같은 신체 부위는 인간의 고유성을 내포하지 않는데 비해, 얼굴은 팔다리와 다르다. 얼굴이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같은 사람은 없다. 동양철학에서도 인간의 몸을 소우주로 보며 또 얼굴은 신체의 축소판이기에 얼굴은 곧 소우주와 같다. 그래서 얼굴을 가린다는 것과 다른 얼굴을 쓴다는 것은 쉽고 단순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가면은 특별한 것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할로윈데이의 시작은 곧 끝에 가까워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랭크에게 가면을 쓴 순간은 가짜 얼굴이 진짜 얼굴이 되는 순간이다. 프랭크에게 가면은 더 이상 가면이 아니다. 그는 가면을 벗을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 프랭크에게 가면은 진짜 얼굴이다.


소론프르프브스밴드는 이런 프랭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밴드 멤버들은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하고 군말 없이 움직인다. 음악적 재능이 부족한 존(돔놀 글리슨)의 불행은 프랭크를 만나며 시작된다. 존은 프랭크 옆에서 비범한 능력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좌절과 절망은 희망을 발견한 순간 싹튼다. 밴드의 또 다른 멤버 클라라(메기 질렌할)는 존을 ‘존재감 없는, 재능 없는, 열개의 뼈마디와 피부일 뿐인’ 키보드연주자라고 표현한다. 영화의 전개는 클라라의 이런 표현에 대한 주석이다.


예술와 종교

tvN<미생>의 장그래(임시완)는 ‘욕심도 허락받아야 하냐’고 오차장(이성민)에게 반문했지만, 최소한 예술의 세계에서 만큼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능한 예술가에게 욕망은 스스로를 태우는 촛불과 같다. 그렇게 점점 작아지는 자신을 알게 될 뿐이다. 프랭크가 돈(스쿳 맥네이리)에게 말한 존이 가진 고상함(돈은 ‘식상함’일 수도 있다고 했다)은 사실 밴드가 가지지 못한 속성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고상해보였을 수 있다. 아마도 프랭크가 느꼈던 그 고상함은 지극한 평범함일 수도 있다.



 예술은 상처를 치유한다지만 예술의 행위자에게는 한없이 잔인하고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 예술에서 ‘ㄹ’받침만 빼면 예수가 되듯 예술은 재단 위에 올라선 종교의 차원과 비슷하다. 모두가 예술을 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작곡을 어려워하는 존에게 돈은 말해 준다. “나는 왜 프랭크가 될 수 없을까 생각하지마. 프랭크는 단 한 명뿐이야.” 예술은 종교처럼 만인에게 개방적이나 추종자 이상의 주체자가 되기를 쉽게 허락하지는 않는다.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르의 불행은 모차르트의 재능을 탐내며 시작되었다. “신이시여 왜 저에겐 음악을 좋아하게 하시고 잘하는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라는 고독한 외침은 예술적 능력과 종교의 특성의 공통점을 보여준다.


예술이 비언어적 행위를 통해 언어를 전달하는 것이라면 존은 예술인보다는 비예술인에 가깝다. 가면 속 프랭크는 존을 위해 '위협적이지 않은 미소를 짓는 중'과 같이 자신의 표정을 언어로 설명해준다. 밴드 멤버들은 그런 행동을 싫어하지만 존은 거부감 느끼지 않는다. 언어화 시켜야만 소통이 되는 존은 사방에 존재하는 것들을 예술화 시키지 못한다. 곡을 만들었다며 키보드로 연주를 하는 존에게 프랭크와 클라라는 칭찬하지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편곡해버리고 존의 곡은 재탄생된다. 이런 능력이 존을 주눅 들게 한다. 그런 재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존이 보이는 것들만 보는 데 반해, 프랭크는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음악적 영감들을 얻는다. 문 여닫는 소리와 냄비 부딪히는 소리는 애초에 음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비음악적 도구에서 소리를 찾아내는 프랭크는 음악이라는 것의 한계를 모르는 듯하다. 존은 가면 속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고 정답이 숨어있을 거라 생각한다. 진짜와 가짜를 끝끝내 구별하려고 하는 존이 예술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다.


빨강과 초록, 시작과 끝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천재성과 평범함을 초록색과 빨간색으로 비유시켜 영화를 전개하려 시도한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영화 초반 존이 영감이 떠올랐다며 집으로 달려가는 장면이다. 존은 초록색으로 페인트칠 된 집을 지나갈 때쯤에 빨간색 버스가 존 옆에서 뒤늦게 출발한다. 빨간색 버스가 존을 앞지르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인간과 버스의 달리기는 승패가 뻔하다.프랭크와 존의 비교는 이렇게 애초부터 체급이 다른 경기였다.

소론프르프브스밴드가 타는 자동차의 색깔 역시 존을 앞지른 버스와 같은 빨간색이다. 존은 우연히 밴드의 눈에(정확히는 프랭크의 눈) 띄어 빨간색 차를 타게 된다. 존과 밴드는 빨간 차를 함께 타고 초록의 숲으로 함께 들어간다.프랭크 옆에서 재능을 배우려고 했던 존의 시도처럼 존과 밴드를 태운 차는 예술의 숲으로 함께 한다. 평범한 사람이 천재와 함께한다고 천재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영화는 ‘아니오’라고 답한다. 초록의 숲과 초록의 집에서 나타나듯이 초록은 예술의 세계를, 빨강은 예술성을 뜻한다.


밴드와 함께 지내지만 존은 음악적 주제를 얻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프랭크는 주제는 뭐든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빨간색 티셔츠와 빨간색 양말은 신은 그에게 프랭크는 “(양말이)독창적이잖아. (빨간색)카펫의 작은 보풀 얼마나 오래 붙어 있었을까? 봄처럼 깨어난 지 얼마 안 됐을까? 아니면 늙었지만 겨울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걸까?”라고 말한다. 결국 예술가로 만들어줄 주제들은 존의 옷에도 그가 발을 올리고 있는 카펫에도 심지어 그가 신고 있는 양말에도 있었다. 그러나 존은 발견하지 못한다. 존은 빨간 차를 타고 초록의 세상에 들어갔지만 끝내 그는 아무 색도 찾지 못했다. 결국 영화는 빛바랜 존의 뒷모습으로 끝난다.

그의 모습은 사뭇 익숙하다. 영화는 존의 뒷모습으로 시작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끝없이 굴러가는 파도, 내게 무엇을 가져올래, 어디로 데려갈래,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는 마을 풍경.”이라고 곡을 써보지만 결국 완성시키지 못한다.이와 대조적으로 영화는 프랭크의 즉흥곡을 마지막에 배치한다. “엘 마드리드, 벽이 마음에 드네. 화장실 냄새, 청소 좀 하지.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줘. 바쁜 손가락, 흥분한 바지.”라고 혼잣말을 하다 이를 바로 노래로 만들어버린다.“화장실 냄새 청소 좀 하지. 담배악취. 퀴퀴한 오줌 탕자는 돌아오고 싶어.개들이 당구치는 곳으로 너희 모두를 사랑해.”그 노래를 듣다가 존은 집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빛바랜 그의 뒷모습이 나온다.


악기의 주인은 누가 되어야 할까

이 세상에 키보드가 겨우 하나 남았다면 그 키보드의 주인은 프랭크가 되어야 할까 존이 되어야 할까.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에 따르면 존보다는 프랭크가 주인이 되는 게 맞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것은 목적에 부합해야 하며 악기의 목적은 잘 연주되는 것이다. 존이 키보드연주자이고 키보드를 좋아하고, 프랭크는 키보드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지만 연주 실력이 더 뛰어나므로 키보드의 프랭크의 것이 되어야 한다. 현대사회는 이처럼 목적론적이지 않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음악을 원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 행할 수 있지만, 모두가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대중이 줄 수 있는 사랑의 총량은 정해져있고, 대중의 사랑을 받을 자격은 오로지 ‘대중의 선택’을 받은 자만 가능하다. 여기서 모호하고도 확실한 기준은 ‘대중의 선택’이라는 부분이다. 연주를 잘 한다고 해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못한다고 해서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기준은 모호하고도 분명하다.


14명에 불과했던 존의 트위터 팔로워는 18404명까지 늘어난다. 존은 정말 음악을 좋아했던 걸까. 어쩌면 음악인보다는 음악으로 유명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존은 그들끼리 음악을 하는 것 자체를 좋아했던 밴드와는 반대로 유명해지고 싶은 인정욕구가 컸다. ‘top 50 hits 1998’, ‘top 50 hit1997’과 같은 인기곡들을 모아놓은 테이프가 존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넌지시 방증한다.결국 존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만든 건 사무실 벽에 붙여놓은 뮤지션의 사인이었다. ‘존에게, 믿음을 포기하지 않길’이라는 한 뮤지션의 방향성 없는 응원이 존을 희망의 낭떠러지로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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