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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28. 2015

비평가의 '펜'은 주방장의 '칼'보다 강하다

<아메리칸 셰프>, 비평가들에게 경고, 모두 '펜'조심!



존 파브로 감독의 <아메리칸 셰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혹시 미국의 직업 시리즈물은 아닐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인 칼 캐스퍼(존 파브로)는 LA의 유명 음식비평가 램지 미첼(올리버 플렛)과의 설전으로 식당을 그만두게 된다. 그는 식당을 그만둔 뒤 푸드트럭을 몰며 열 살 아들과 함께 쿠바식 샌드위치를 파는 여정을 시작한다. 트럭을 몰며 칼은 '일의 의미'와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한다.


식구(食口)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


영화는 레스토랑과 푸드트럭이라는 두 가지 공간에서 각각 다른 맛의 즐거움을 보여준다. '빈 속으로 보지 말 것'이라는 포스터의 광고문구처럼 영화는 푸드트럭을 몰기 전까지는 다양한 요리로 관객의 미각을 시각적으로 자극한다. <아메리칸 셰프>는 한국의 '먹방'이라는 의미와 비슷하게 미국의 '푸드 포르노'라는 것의 일종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공간, 푸드트럭에서 칼 캐스퍼는 동료와 아들 그리고 전 부인에게서 다시금 잊고 있었던 가족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리고 요리라는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는다. 영화는 감동을 억지로 주입시키지 않고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간이 적절히 배어있는 건강한 코스요리 같은 느낌을 준다.  


주방이라는 공간은 군대와 비슷한 점이 많다. 무기를 쓰며 업격한 계급체계가 있다. 오랫동안 주방의 장으로 살아온 칼 캐스퍼에게 주방이라는 공간은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이고 더 나아가 그의 모든 것이었다. 푸드트럭은 칼에게 경제적 독립이라는 표면적인 의미 외에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진정한 가장이 되고 아빠가 되고 남편이 되는 성장공간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 칼이 "아들도 사랑한대(He said love you, too)"라며 전 부인에게 전달하며 묘한 감정을 느끼는 과정까지의 감정흐름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아메리칸 셰프>는 비평가들로 하여금 영화가 가지는 아쉬움에 대해 쉽게 지적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주방의 '책임자' 위에 문화'권력자'


<아메리칸 셰프>가 요리를 소재로 한 가족영화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비평가에 대한 일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주방은 전쟁터이고 주방은 곧 요리사의 삶 자체다. 한 요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요리사들은 단 몇 분이 아닌 요리사의 삶을 농축시켜 만든다. 칼 캐스퍼는 자신의 요리를 혹평한 음식평론가 램지 미첼에게 이렇게 따진다.


"아프다고. 니가 그런 글 쓰면 내가 상처받는다고. 이 망할 사장 문닫을까봐 굽신대는 것 봐. 너 뭐하는 놈인데? 앉아서 쳐먹고 단어 몇 글자로 토악질만 하는 놈이!"


그의 말은 음식평론가 뿐만 아니라 영화평론을 포함한 현대의 모든 평론가들에게 고하는 창작자의 외침같아 보인다. 그래서 칼 캐스퍼의 외침은 모든 평론가의 자세를 고쳐앉게 만든다. 하지만 '평론의 죽음'으로까지 일컬어지는 평론계의 상황을 봤을 때, 칼의 외침은 단순히 평론계에게만 국한시킨 비판같지는 않다. 영화 속의 비평가는 말 한마디와 글 한 문장으로 생과 사를 결정짓는 '언론권력'에 가깝다.


실제 영화에서도 비평가는 시작을 알리고 끝을 맺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비평가는 칼 캐스퍼가 식당을 관두며 푸드트럭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만든 사람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엔 '쿠바 샌드위치'의 맛을 극찬하며 건물에 들어와 식당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한다. 칼 캐스퍼는 그의 제안을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며 헤피엔딩으로 끝난다.


비평가와 칼 캐스퍼의 직접적인 만남이 한 번 밖에 없어다는 점에서 비평가의 제안은 굉장히 파격적이다. 그래서 그의 갑작스런 등장과 제안은 관객에게 감정적 동의를 구하기 힘들어보인다. 하지만 일류 레스토랑의 주방장을 트럭을 몰게 하고 또 내리게 만드는 인물은 사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받는 칼 캐스퍼 역시 현실적이다(어쩌면 열 살 아들의 대학등록금을 고민했을 수도 있다). 영화는 헤피엔딩으로 끝나지만 마냥 해피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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