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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Jun 30. 2017

다른 시간을 사는 여자와 남자, <봄날은 간다>

은수와 상우의 대사를 중심으로

<봄날의 간다>의 오프닝은 두 남녀의 운명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를 따라가는 상우


오프닝에서 상우(유지태)의 할머니가 눈이 내린 길을 천천히 걸어가고, 상우는 할머니를 부르며 따라간다. "할머니! 어디가요! 할머니 같이가"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상우는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를 따라잡고 자전거에서 내리지만 할머니는 아랑곳 않고 속도를 내며 걷는 것이었다. 할머니와 상우의 보면 둘은 같은 길을 가지만 같이 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앞서가고 자신의 속도와 방향으로 길을 가지만, 상우는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속도를 맞추는 게 아니라 한 명이 자신의 길을 가고 나머니 한 명은 그 길을 따라가려 하는 꼴인데, 이것을 함께 간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우의 친구(박준서)는 상우의 이별을 위로한다.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고 상우는 낙담한다. 그런 그에게 상우의 친구는 이런 말을 한다. "상우야, 그 여자 잊어. 그 여자 할머니 됐다고 생각해라. 머리도 하얗고 주름살도 많고 그러지 않냐. 그런 생각하면 좀 도움되지 않냐." 이에 대해 상우는 "그러네. 그러니까 불쌍해진다 야. 근데 보고 싶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이미 봤듯이 상우는 자신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상대방을 따라가는 사람이며 연민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상우의 사랑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우가 사랑하는 은수(이영애)는 연민이나 정보다는 자신의 즉흑적인 욕구에 더 충실한 사람이다. 둘은 정말 다르다. 이 영화는 각자 다른 시간을 살아왔던 남녀가 어떤 식으로 만나고 헤어지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먼저 은수의 대사들을 보자. 상우에게 향하는 은수의 대사는 무색무취하다. 긴 고민에 의해 나오는 말들이 아니라 즉흑적으로 발화되는 것이다. 이미 유명한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가 나오기 전에 어떤 대사가 나왔는지 보자.


태워다줘서 고마워요


은수:(집까지 차를)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상우: 고맙긴요 뭘.(침묵)여기요.(악수를 한다)



그리고 은수는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간다. 00:26:39에 프레임아웃되어 26:45에 다시 프레임인되는데. 6초 안에 은수는 "라면 먹을래요>"라는 문장을 완성한 것이다. 물론 그 대사를 말하기 전까지 수도 없이 고민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후에 반복되는 은수의 충동적인 말과 행동을 보면 '라면 제안'은 계획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결국 한밤중 식사 자리에 초대받은 상우는 은수가 자신의 어지러진 방을 치우는 동안 현관문 밖에 서있는데, 그것 역시 이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파도 넣을 건데


이후 라면을 준비하는 동안 은수는 더 파격적인 질문을 한다. 라면을 뜯으려다가 말고, 냄비 속 끓고 있는 물을 한 번 보고 앞머리를 넘긴 다음 하는 말 "자고 갈래요?" 라면 제안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둘은 차 태워줘서 고맙다는 형식적인 말과 함께 헤어질 때 악수를 하던 어색한 사이였으나 은수는 자고 갈래요라는 동침 제안까지 하는 것이다. 이 대사 전에는 겨우 한번의 대화가 있었다.


라면 먹고 갈거냐고 물어서 들어오긴 했는데 어색


상우: 어떤 술 좋아해요?

은수: 그냥 뭐. 왜요?

상우: 아니...(바닥에 있는 술병이)다양해서..


상우: 혼자 산 지 오래 됐어요?

은수: 재밌는 얘기좀 해봐요.

상우: (살짝 당황하다가)라면에 소주 먹으면 맛있는데. 나 재밌는 얘기 몰라요(멋쩍게 웃음). 원래 썰렁해요.

은수: (옅게 웃으며)재밌다.


질문을 보면 상우가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 있다. 상우가 어색한 상황에서 은수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술은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혼자 산 지는 오래되었는지. 은수라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해 궁금한 것이다. 그런데 은수는 그런 질문에 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에게 대해 말해주고 싶지 않다. 그러니 "자고 갈래요?"라는 질문을 하는 데 마음을 먹게 한 것은 오직 '재미'였던 것이다.


영화가 상우와 은수를 나태내는 방식 또한 다르다. 혼자 산 지 오래 되었냐는 질문에 은수가 답하지 않듯 은수는 이혼했다는 배경만 있을 뿐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나타나있지 않다. 은수는 방송국에서 아나운서와 피디를 겸하고 있고, 업무 중 하나는 취재를 나가서 시민과 인터뷰를 하는 일이 있는데, 대나무숲 소리를 들으면 어떤지 등등을 묻는데 그 묻는 태도에는 궁금증이라는 것이 없다. 누가 어떻게 사는지, 그 사람의 사연은 재미없는 것이고 관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권태롭고 기계적이다) 상우와 은수가 처음 집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둘이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길과 방향을 가는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우연히.


영화가 교차적으로 상우와 은수를 보여주지만 상우의 모습은 가족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다. 할머니와 함께 있거나 가족들과 밥을 먹는 모습. 은수와 헤어지고 혼자 라면을 먹을 때에도 아버지는 힘내라며 소주를 두고 간다. 하지만 은수가 나오는 장면들은 상우와 함께 있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은수가 방향을 주도한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다.


은수에게 운전면허를 가르쳐주기 위해 운전석에 같이 앉은 상우


상우가 은수에게 운전을 가르치기 위해 상우가 운전석에 앉고 그 위에 포개어 은수가 앉아 운전을 하는 모습이다. 둘은 함께 하고 있지만, 길은 은수가 끌고 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차에서 내려 잠시 쉬는데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논밭이 있고 그 뒤로 산이 이어져있는데, 앞에 가지가 잘려있는 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위에는 숲이 있다. 그 나무는 상처입은 나무로 볼 수 있는데, 은수가 그런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상우는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나타내지는 것처럼 숲 속에 함께 어울리는 나무다. 둘은 팔짱을 끼지만 나무가 자리를 이동할 수 없듯이 둘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임을 표현하고 있다. "상우씨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힐까?"라고 하는걸 보면 은수는 상우를 사랑하긴 했으나 상처가 있어서 쉽지 않다.


헤어질 때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상우는 묻지만, 사실 사랑이 변했다기보다는 우연에 의한 둘의 짧은 만남이 다시 각자 제 갈 길을 간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북엇국을 먹이려고 은수를 깨우는 상우



둘의 멀어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인 북엇국씬이다. 이 장면에서 상우는 그 전날 술을 많이 마신 은수를 위해 북엇국을 끓이지만, 은수는 생각이 없다며 먹지 않는다. 밥 생각이 없으면 먹지 않고, 사랑이 하고 싶으면 하는 은수의 삶의 태도에 있어서 싫은데 하게 되는 일은 없는데, 상우가 계속 생각이 없는데 먹으라고 하는 행동은 지나친 것이었다. 반면에 상우의 입장에서는 북엇국을 끓어주는 것이 너무 당연한 행동이었다. 이미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늙어버린 은수를 생각해도 불쌍하다고 하는 상우의 성격에 숙취로 힘들어하는 은수를 보는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속상해하는 상우에게 사탕을 주는 할머니



영화의 후반부에 할머니는 또 기차역에 간다(치매가 걸린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기다린다며 계속 기차역에 간다). 그런 할머니에게 "가요. 이제 정신 좀 차리세요!"라고 말하는데 할머니는 조용히 사탕을 상우에게 먹인다. 그리고 그걸 먹는다. 이제 정신 좀 차리라는 말이 상우 본인에게 하는 자기성찰적인 메세지처럼 느껴지지만, 중요한 건 속상해하는 상우에게 사탕을 주는 할머니의 마음이다. 상우의 가족은 곁에 누군가가 아파하면 소주든, 사탕이든 뭔가를 주면서 위로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상우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헤어진 뒤 오랜만에 만난 은수는 상우와 이런 말을 한다. "우리 한달만 떨어져있어보자"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둘이 사는 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봄날은 간다'라는 제목에도 나타나듯 이 영화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는 영화이며, 사람은 각자의 사계절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할머니가 아무리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고 그런 상우를 자전거를 타고가서 같이 가려고 하지만 사계절의 순환이 다른 여자와 남자가 함께할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 한달만 떨어져있어보자"는 말 이후에 둘의 시간은 점점 더 벌어진다. 은수는 다른 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계절이 넘어간 셈이다. 하지만 상우는 힘들어하고 보고 싶어한다. 아직 그 시간에 머무는 것이다. 함께 있을 때에는 상우가 은수를 따라가려는 노력이라도 하겠지만, 각자의 시간을 살면 둘은 다른 시간을 지낼 수밖에 없다.


<사진 제공> 싸이더스, 씨네마서비스, <봄날은 간다>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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