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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Feb 03. 2019

이주광의 느긋한 항해

뮤지컬 <루드윅> 배우 이주광 인터뷰


카페 안으로 들어온 배우 이주광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탈색한 단발에 가까운 머리는 그가 연기하고 있는 뮤지컬 <루드윅> 속 베토벤을 많이도 닮았다.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피아노를 조금 쳐봐도 될까요?”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조심스러운 피아노 연주가 만들어내는 멜로디는 완성된 음악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피아니스트처럼 보이기 위해 수십 번은 연습했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대학로에서 배우 이주광을 만날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겹쳐서 출연하는 경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는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2016년 11월 그는 뮤지컬 <고래고래>에 출연했던 그가 다시 무대에 선 것은 지난 2017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이 흘러서야 뮤지컬 <배니싱>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 다른 배우들이 1년에 두 작품에서 많게는 네 작품까지 하는 것에 비하면 무대에 서는 시간보다 무대 밖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은 것이다. 그래서 <배니싱>이 막을 내린 지 이틀 만에 <루드윅>으로 관객들을 만난 이주광의 모습은 반갑지만 뜻밖이었다.


실패한 인생은 없기 때문에

이주광은 비(非)활동 기간이 길다는 사실을 이미 의식하고 있다. 그동안 동료들과 팬들이 그에게 너무 오래 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해왔기 때문이다. <루드윅>에 참여하게 된 계기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았지만, 그 외에도 그를 <루드윅>으로 이끈 이유가 많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번 뮤지컬은 ‘운명’ 같았다. “무대 위에서 자주 서달라는 말을 항상 마음속에 담아두고는 있었어요. 추정화 연출가님에게서 베토벤에 관한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는데 혹시 같이해볼 생각이 없냐고 연락을 받았어요. 어릴 적에 아버지가 지휘자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레 클래식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그때 베토벤 음악도 많이 들어서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베토벤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든 적은 없더라고요. 제안을 받고 호기심과 함께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배니싱>이 끝나고 나서 딱 이틀 후 개막이라 이 모든 것이 운명 같은 느낌 마저 들었어요.” 무엇보다 그의 마음을 이끌었던 것은 뮤지컬의 줄거리였다. 뮤지컬은 천재 음악가의 화려한 모습이 아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 아픔과 상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루드윅>이 베토벤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작품이라 더 끌렸어요. 아무리 대단한 인간도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이 있잖아요. 베토벤은 어렸을 때 피아노 연주를 틀릴 때마다 아버지에게 맞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조카 카를에게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억압하는 결과를 낳거든요.”


이주광이 상처를 가진 외로운 인물을 연기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뮤지컬 <빨래>에서 차별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연기했고, <헤드윅>에서는 트랜스젠더, <브루클린>에서는 노래하는 노숙자 역을 맡았다. <헤드윅> 무대에 오른 지 10년이 흘렀으니 그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꽤 오래된 소신인 것이다. “약자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고 저는 그 사람들의 인생이 실패했거나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 사람들이 소외당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좋겠어요. 저는 관객들이 트랜스젠더,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연기를 했어요.” 헤드윅, 솔롱고, 자신이 연기했던 캐릭터를 한 명씩 언급하는 이주광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 어렸을 적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의 집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사회에서 정해놓은 평균적인 삶을 살기엔 부족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신문도 배달하고, 음식점 홍보 전단도 나눠주고요. 또래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렇게 살다 보니 어린 나이에 다양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게 된 거죠. 다른 사람들은 실패했다고 말하는 그런 삶이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닌데, 나도 좀 인정받으면 좋겠다, 누가 내 말을 좀 들어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금껏 작품을 골라왔어요.” 


나의 아버지, 나의 루드윅

이번 작품에서 이주광의 목표는 ‘베토벤 같은 이주광’이 아닌 베토벤 그 자체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베토벤의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에 대해 공부하고, 청각 장애가 온 뒤에 베토벤이 만든 음악을 듣고, 베토벤이 누구와 이별했으며 그때는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찾아봤다. 다만, 이주광은 귀가 들리지 않는 음악가의 상실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그는 베토벤이 느꼈을 큰 좌절을 한 차례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서른 살쯤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어요. 철심을 여섯 개나 박는 큰 사고였어요. 회복한다고 해도 제대로 걷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말까지 들었죠. 어렸을 때부터 뮤지컬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는데 모든 것이 소용이 없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크게 절망했어요. 그런데 좌절감이 바닥까지 닿고 나니 내가 가진 것을 전부 잃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베토벤이 귀가 먼 상태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것처럼요. 재활하는 시간이 정말 괴로웠지만 조금씩 걷게 되었고 뛸 수도 있었고, 마침내 춤출 수도 있었어요. 그 경험이 지금 베토벤을 연기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뮤지컬은 베토벤이 청각 장애 겪고 극복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다루긴 하지만 주된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베토벤과 주변 사람들, 특히 그의 조카 카를과의 관계가 핵심적이다. 어린 베토벤은 칭찬은커녕 모차르트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폭력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 어른이 된 베토벤은 카를에게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주지 않으려 자상하게 대하려 하지만, 오히려 카를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상처를 주게 된다.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베토벤을 연기하며 이주광은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자주 떠오른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베토벤과 비슷했어요. 베토벤이 카를에게 ‘피아노 잘 치니까 사람들 앞에서 연주해 봐’라고 하는 것처럼 제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셨어요. 예술적 재능도 많은 분이었는데, 나중에는 목회자가 되셨고요. 그런데 제가 뮤지컬배우를 하는 건 반대하셨어요. 결국 아버지와 최종담판을 했죠. 그해 안에 뮤지컬 오디션에 합격하면 나의 길을 인정해달라고 했죠.” 이주광은 그해 11월 28일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데뷔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의 데뷔 무대를 보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아들의 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처음 본 그의 공연은 <헤드윅>이었다. “아버지가 정말 싫어할 내용이었어요. 평소에 음악도 아니라고 깎아내린 록이 나오고, 트랜스젠더가 등장하고 저는 여장을 하고요. 하하. 물어보나 마나 진짜 싫어하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누나를 통해 예상외의 대답을 들었어요. 제가 무대 위에서 극을 이끌어 가는 모습을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럽게 보셨다고요.” 이주광은 아버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사용했다. “저는 운명을 믿는 편인데 제가 왜 <루드윅>을 하게 된 건지 이제 알 것 같아요. 베토벤을 연기하면서 아버지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시간이 되고 있어요. 한때는 미웠지만 지금은 너무 보고 싶죠.”


누구도 아닌 그 자체이고 싶다

이주광은 베토벤이 겪은 청각 장애를 연기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의 인터뷰 영상과 관련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직접 병원에 찾아가서 움직임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는 귀가 불편한 사람들은 다른 감각에 의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주광이 무대 위에서 베토벤을 연기할 때 상대방의 입이나 눈을 집중한 채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귀가 안 들리면 보행에도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그래서 극 중 인물이 저에게 춤을 추자고 일으킬 때도 균형을 잡는 듯한 사소한 움직임을 티 나지 않게 연기하려고 하죠.” 이주광은 기자에게 대답하며 베토벤이 대화를 할 때 어떤 표정 연기를 하는지 보여줬다. 그는 무대 위 베토벤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눈과 표정을 빤히 쳐다봤다. 하얗게 탈색한 머리부터 표정까지 이주광의 모습은 영락없는 루트비히 반 베토벤 같았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이주광이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완벽히 그 인물로 보이고 싶어요. 관객들 모두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은 베토벤이 아니라 이주광이라는 것을 알잖아요. 그렇지만 이야기에 몰입하는 순간 저는 베토벤이 되죠. 무대란 마법 같은 공간이고, 관객들은 그 마법을 볼 준비가 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저는 무대가 부린 마법이 하루, 일주일, 길게는 한 달 동안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머리를 기르고 탈색을 하고 그 인물이 되려고 하는 거죠.” 캐릭터에 완벽히 몰입하는 것은 이주광의 오래된 연기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 사이에 공백이 긴 이유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캐릭터가 제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배역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적도 있었어요. 특히 <헤드윅>을 할 때는 정말 날카로웠어요. 마치 제가 헤드윅이 된 듯 냉소적으로 변하고 상처 주는 말도 쉽게 하고요. 친구들이 그때의 저를 상대하기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데뷔한 지 15년이 되었으니, 다행히 지금은 어느 정도 배역과 저를 떼놓을 수 있는 것 같아요.”



15년이라는 쉼표이자 마침표

이주광이 아버지와 최종담판을 벌이며 데뷔한 것이 어느새 15년 전의 일이다. 연말을 앞두고 15주년 단독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그는 자신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이라는 게 생기는 것 같아요. 연기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이주광이라는 사람에 대한 열정이요. 원래는 저라는 사람을 싫어했었거든요. 그런데 점점 마음에 들고 있어요. 예전에는 콤플렉스를 가리려고만 했는데 이제는 나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사람으로 변했어요.”


그의 변화의 중심에는 역시 뮤지컬이 있었다. 매 작품마다 다른 인생을 사는 캐릭터를 이해하다 보니 자신에 대해 이해심이 생기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뮤지컬을 통해 인생을 배웠고, 뮤지컬이 곧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이주광은 2019년을 맞이하며 지금보다 더 바빠질 예정이다. 무언가를 남기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또 이주광이라는 인간 자체로서 말이다. “15주년이 되었는데 저에게 남아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기나 춤, 노래 모두 무형예술이지만 영화배우는 영화를 남기고 가수는 앨범을 발매해서 당시의 모습을 담잖아요. 그런데 뮤지컬은 남길 수 없어요.” 이주광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기 위한 비밀 프로젝트에 대해 조심스레 귀띔했다. “사실 제 꿈 중의 하나가 ‘록스타’예요. 오래전부터 록밴드 활동을 하고 싶어서 조금씩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아직 멤버를 확정하진 못했지만 언젠가는 전 세계를 다니며 콘서트를 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 혼자 작사, 작고, 연출 모든 부분을 책임지는 뮤지컬을 만들어보고 싶기도 해요. 하고 싶은 게 많아요. 이제는 정말 쉬지 않아도 좋아요.”


출처: http://theartpark.co.kr/201901_%EB%B0%B0%EC%9A%B0%EC%9D%B4%EC%A3%BC%EA%B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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