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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Feb 0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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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박종해 인터뷰

오후 두 시, 인터뷰를 위해 스튜디오를 찾은 피아니스트 박종해에게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전날 독일 하노버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빠듯한 일정 탓에 그의 컨디션을 걱정했던 기자를 “점심을 못 먹어서 조금 배고플 뿐이에요“라는 말로 안심시켰다. 그는 다른 매체와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9년 전,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대회에서 수상하며 오래전 주목받은 이 피아니스트를 미디어가 앞다투어 다시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9년 금호아트홀 상주음악가로 선정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며, 6개월 전 준우승한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게자 안다 콩쿠르 소식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완성된 박종해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다렸던 건 아니었을까. 그는 ‘박종해다움’을 찾기 위해 항상 고민했고 일 년 동안 이어질 상주음악가 공연을 통해 이제 그 대답을 할 준비가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박종해는 현재 하노버국립음악대학의 교수 아리에 바르디를 사사하며 독일에 머물고 있다. 피아니스트 아리에 바르디는 박종해뿐만이 아니라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다솔 등의 스승이기도 한 한국 피아니스트와는 인연이 깊은 음악가다. 박종해가 기억하는 하노버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온통 회색빛’이었던 도시의 생활이 심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하노버에서의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도시의 생활은 음악이 만들어진 이유를 명확하게 알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독일에서의 삶은 바쁘지 않아요. 수업도 많지 않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음악을 들으며 동네를 걷곤 하는데, 연습할 때보다 일상적인 생활 덕분에 음악을 더 알게 되는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이란 서양음악이고 그 중엔 독일 작곡가가 많잖아요. 그들이 살았던 환경을 거닐다 보면 음악이 더 생생하게 와닿아요. 서울에서 듣는 음악과 하노버에서 듣는 음악은 분명히 다르거든요. 한국에서는 아침부터 바빠서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어요.”


피아니스트는 놀았을 뿐이다

여유로운 하노버에서의 생활은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박종해가 피아노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하노버의 고요한 생활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헤이븐의 외곽으로 이사를 했다. 영어가 서툴렀기에 TV를 이해하지 못했고 친구도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음악이었다. 박종해는 어머니가 사준 전자피아노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주했다. “학교를 다녀오면 피아노를 치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피아노를 치는 생활을 반복했어요. 앞으로 음악을 하겠다거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서 연습한 건 아니었어요. 저에게는 피아노가 전부였고, 유일한 장난감이었거든요.” 그 이후 박종해는 피아노를 단 한 번도 놓지 않았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도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가 많은데, 어린 나이에 어떻게 묵묵히 한길만 갈 수 있었을까. 기자의 우문에 박종해는 대답했다. “오히려 어려서 가능했어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저는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어야지, 어떤 음악을 해야지 생각한 게 아니라 즐거워서 연주했던 거예요. 그 나이에는 다들 공부가 싫고 노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저에게는 피아노 연주가 노는 거였어요. 다른 생각은 끼어들 틈도 없이 그때는 오직 피아노랑 저밖에 없었죠.”


피아노와 논다는 말처럼 박종해와 잘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그는 2017년 관객들에게 즉흥연주를 선보인 적이 있다. 관객들이 즉석에서 A#, D♭ 등의 음을 말하면 박종해가 즉석에서 그 음들을 조합해 하나의 곡을 만드는 식이다. 피아노와의 놀이를 관객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지난 7월 개최한 평창대관령음악제의 프로그램 중 하나였던 ‘네 멋대로 해라’ 역시 박종해의 즉흥연주 공연이었다. 음악제의 예술감독을 맡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그 당시를 회상하는 박종해에게서 예상외의 답변이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하고 싶지 않았어요. 즉흥연주는 혼자 연습실에서 하거나 친한 피아니스트들과 하던 놀이었어요. 다른 분들이 즉흥연주라고 불러주지만, 저는 그걸 연주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요. 제가 즉흥으로 피아노 치며 노는 걸 보고 예전부터 손열음 씨가 무대 위에서 한번 해보자고 했는데 계속 거절했어요. 그게 6년이나 걸렸던 거죠. 그런데 처음에는 죽어도 하기 싫었어도 막상 해보니 막혔던 멜로디를 풀어나갔을 때는 뿌듯하더라고요.” 하지만 즉흥연주에 대한 그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다. 멜로디를 만드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흥연주를 할 때는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을 토대로 멜로디가 만들어지는 건데,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 매번 바뀌는 게 아니니까 크게 다르지 않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몇 개의 포맷을 대충 짜놓으면 즉흥연주할 때 도움되지 않겠냐고 하던데, 그건 또 싫어요. 완전히 즉흥으로 연주하지 않으면 즉흥연주의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가끔 앙코르할 때만 하고 있어요.”



콩쿠르, 콩쿠르, 슬럼프, 콩쿠르

피아니스트에게 콩쿠르란 어떤 의미일까. 스트레스를 주지만 성취감과 보상을 주는 애증 관계가 아닐까. 하지만 박종해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한다. “애증도 아니고 증이에요.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성취를 한다는 것 자체는 좋지만 이렇게까지 경쟁하면서 쟁취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필요하니까 나가는 거죠.” 과연 박종해는 그렇게 말한 만도 했다. 2008년 홍콩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수상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였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콩쿠르는 그에게 2위만 선물했기 때문이다. 더블린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트롬소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나고야 국제 음악 콩쿠르 2위. 최근 수상한 게자 안다 콩쿠르에서도 2등이었다. 그렇게 콩쿠르가 반복되던 어느 날 박종해에게 깊은 슬럼프가 찾아왔다.

처음 피아노와 만난 9살 이후 단 한 번도 멀어진 적 없었던 그가 슬럼프를 겪은 이유는 피아노를 연주할 기회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박종해는 한동안 머리도 자르지 않고, 사람들도 잘 만나지 않으며 조용히 칩거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피아노를 보고 있으면 분명히 좋은데,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더라고요. 기회가 점점 없어졌으니까요. 나중에는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은 기분도 들었어요. 게자 안다 콩쿠르에 나가기 전까지 7개월은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슬럼프를 이기고자 고민 끝에 출전한 게자 안다 콩쿠르는 그에게 또 한 번 2등이라는 결과를 안겨줬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박종해는 아쉬움보다는 감사함을 크게 느꼈다. 게자 안다 콩쿠르는 수상자에게 많은 연주 기회를 제공하는 콩쿠르로 무대에 설 기회가 부족했던 박종해에게 그만큼 좋은 선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슬럼프를 이기고 콩쿠르에 나갔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의미가 커요. 그리고 콩쿠르에 나가면서 태도도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콩쿠르에 나가면 당연히 수상한다는 거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슬럼프를 겪고 나니 1차만 되어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끝날 때까지 감사한 마음뿐이었어요. 제가 2등을 유독 많이 했는데, 예전에는 솔직히 기분이 나쁘기도 했었거든요. 하지만 이번만큼 감사한 2등이 없었어요.”


많은 음악가들에게 콩쿠르는 애증이자 증이듯, 콩쿠르에 대한 질문에 그의 이야기보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는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만들었다. “콩쿠르를 할 때만큼 긴장할 때가 없어요. 몸이 위축되고 스트레칭을 해도 안 풀려요. <더 파이팅>이라는 만화책에서 처음 보고 따라 한 건데, 손바닥으로 등을 정말 세게 때리면 굳었던 몸이 한결 풀려요. 무대로 올라가기 직전에 근처에 있는 분에게 부탁하는 거죠. 싫어하는 사람 상상하면서 정말 세게 쳐달라고(웃음). 저 말고는 이렇게 긴장을 푸는 사람을 못 봤는데, 알고 보니 록밴드 퀸의 프레디 머큐리도 그렇게 하더라고요.”

충분한 휴식 역시 그만의 컨디션 관리법이다. 홍콩 국제 콩쿠르에서 뜻하지 않게 낮잠을 잤는데 오히려 도움을 줬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숙소에서 콩쿠르 당일에 연습을 하다가 잠깐 잠들었는데, 호텔 청소부가 들어와서 저를 깨우더라고요. 제가 너무 늦게까지 잠을 자서 콩쿠르 관계자가 보낸 거였죠. 머리에 새집 지은 상태로 옷만 갈아입고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2시 57분이었어요. 시작하기 3분 전이라 손도 못 풀고 이번 콩쿠르는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결과가 좋았어요. 그때부터 연주 당일에는 연습보다는 잠을 충분히 자고 있어요. 오랫동안 콩쿠르를 하며 느꼈는데 너무 많은 생각은 방해만 되더라고요.” 


서른 살 피아니스트의 자세

박종해는 2019년이면 서른이 된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서 2019년이라는 연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갈 때 며칠 동안은 우울한 마음에 아무것도 못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성인이 되었다고 좋아했는데, 저는 ‘벌써 20대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에 슬펐어요.” 그럴 만도 했다. 박종해는 영재입학으로 고2의 나이에 이미 대학교 1학년이었기 때문에 20대가 주는 해방감보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10대 피아니스트가 아닌 20대 피아니스트만의 새로운 연주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30대란 말이 가볍지 않은 이유다. “제가 걱정이 많은 편이라 그래요. 대학에 들어간 지 어느덧 10년이 흘렀잖아요. 20대와는 다른 30대 피아니스트만의 음악을 보여줘야 할 것 같고요.” 그가 금호아트홀에서 보여줄 상주음악가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고민들이 녹아있다. “2019년의 연주를 통해서는 저의 인생을 돌아보는 연주를 보여주고 싶어요. 박종해라는 사람이 지금껏 해온 음악과 앞으로 들려주고 싶은 음악을 함께 보여주려고 해요.”


1월 10일에 열리는 그의 첫 번째 공연은 이러한 그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총 네 곡 중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슈베르트는 박종해가 처음 연주하는 곡이고, 나머지 프로코피예프의 두 곡은 10대 후반부터 많이 연주했던 곡이기 때문이다. 네 개의 곡은 박종해가 스스로와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나는 10년 전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는 어떤 음악이 하고 싶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거죠. 얼마나 다를 것인지, 다르긴 한 건지 저도 확실히 말은 못 하겠어요. 본인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제 몫이 아닌 것 같아요. 음악을 들어주시는 관객들의 몫이죠.”


피아노와 함께 놀 수 있는 기회를 원했던 박종해에게 2019년만큼 선물 같은 해가 또 있을까. 금호아트홀은 일 년 동안 다섯 번의 정기적인 무대를 약속했고, 게자 안다 콩쿠르는 50여 회를 유럽 공연을 제공할 예정이며, 박종해의 달력에는 현재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취리히 톤 할레 등에서 열릴 리사이틀 일정이 빼곡하다.


그는 올 한 해 그동안 찾으려 했던 ‘박종해다움’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과 함께 한풀이를 할 것이라 포부를 밝혔다. “항상 저다운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왔어요. 어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지 물으면 아직도 대답하기는 힘들지만,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어요. 하나의 틀에만 구애받지 않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음악을 하고 싶다고요.” 인터뷰가 끝나고 박종해가 떠난 자리에서 그의 연주에 대한 게자 안다 콩쿠르 심사평을 다시 한번 읽었다. ‘그의 음색은 거대 교향곡을 떠올리는 동시에 아주 여린 피아니시모를 표현해낸다. 그는 강한 내면과 진심 어린 감성을 모두 표현해내는 최고 수준의 연주자다.’ 어쩌면 그가 원했던 여러 가지 색깔은 지난 6월 스위스에서부터 무르익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출처: http://theartpark.co.kr/201901_%ED%94%BC%EC%95%84%EB%8B%88%EC%8A%A4%ED%8A%B8%EB%B0%95%EC%A2%85%ED%95%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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