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더 데빌> 배우 김찬호 인터뷰
예전에 뮤지컬 <더맨인더홀>의 늑대를 연기하기 위해서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캐릭터를 준비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X블랙을 연기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제가 예전에 인상 깊게 봤던 영화 중에 <데빌스 에드버킷>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키아누 리브스와 알 파치노가 출연하는데,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변호사가 승승장구하다가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예요. 인물 관계가 <더 데빌>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최근에 다시 봤어요. 영화에서는 존 밀튼(알 파치노 분)이 X블랙과 비슷해요. 그 사람은 자신이 책임지지 않고 케빈 로맥스(키아누 리브스 분)로 하여금 계속 선택하게 만들어요. X블랙도 존 파우스트 혹은 그레첸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주면서 본인이 선택하게끔 만드는 것처럼요. 알 파치노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악해 보이지 않게끔 연기하는데 ‘역시 굉장한 배우다’하고 감탄하면서 공부했죠.
X블랙을 맡은 다른 배우들과 김찬호의 X블랙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차지연 배우는 초연 때 그레첸 역을 맡았고, 이번에는 여성 배우 중 처음으로 X블랙 역할을 맡게 되었잖아요. 어떻게 연기할지 가늠이 안 되고 저도 많이 궁금해요. 임병근 배우는 첫인상과는 달리 감미로운 면이 있더라고요. 부드럽게 유혹하는 X블랙을 선보일 것 같아요. 저는 악해 보이지 않고 어느 편인지 헷갈리는 X블랙처럼 보일 거예요. 악인지 선인지 알 수 없는 X블랙이죠.
X블랙은 인간을 악하다고 믿고, X화이트는 선하다고 믿는데, 인간에 대한 김찬호 배우의 솔직한 생각은 어떤가요?
사실 저는 성선설을 믿는 사람이에요. 인간은 착한 것 같아요(웃음). 인간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어긋난 믿음을 가지거나 환경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악해지는 것 같아요.
인간이 아닌 역할을 주로 맡아서 별명도 생겼다고 하죠? 그런데 이번에도 악을 연기하게 되었어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궁금해요.
우선 말씀드리자면, 굳이 인간이 아닌 역할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의 이미지가 강한 개성의 캐릭터와 어울려서 그런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작품이 세 개 정도 들어오면 지금 맡은 캐릭터와는 최대한 다른 캐릭터가 있는 작품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려고 해요. 그래서 <미인>에서는 일본인 형사를 맡았다가 <록키호러쇼>에서는 외계인 역을 연기했고, 지금은 X블랙을 하고 있는 거죠.
이미지 때문에 강한 역할을 많이 맡게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있죠. 사실 저는 황정민 선배가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보여준 가슴 절절한 연기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따뜻한 스토리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 그런 연기를 잘하고 싶은데 제가 가진 이미지가 있다 보니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에는 무리해서라도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에 참여하기도 했던 거고요. 비록 건달 역할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맡은 역할들 중에서는 여리고 인간적인 캐릭터였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연기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나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지저스 역을 해보고 싶어요. 저의 이미지가 지저스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어서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요.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역은 선과 악을 모두 표현하니까 매력적이어서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보고 싶어요. 최근에는 <프랑켄슈타인>을 봤는데 그 작품에서는 빅터와 괴물 역할 둘 다 욕심이 나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또 인간과는 거리가 있는 역할들이 많네요(웃음).
어릴 적부터 배우가 꿈이었나요?
아니요.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굉장히 내성적이라 앞에 나서지도 못했고요. 부모님이 제 성격을 바꾸게 하려고 웅변학원에도 보낼 정도였어요. 그래도 욕심은 많아서 학창시절에는 여러 가지를 다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공부도 잘하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운동도 좋아했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축구선수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받았는데, 부모님이 극구 반대해서 운동선수는 포기했죠. 그러던 어느 날 대학로에서 故 강태기 선생님의 연극 <검정고무신>을 봤는데, ‘아! 이거다’ 싶더라고요. 연기를 하면 다양한 인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배우가 되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가요?
아니요. 처음에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고,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는 뮤지컬 시장이 많이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았거든요. 일단은 연극배우가 되기 위해서 연극과에 진학했고, 나중에는 소속사에 들어가서 광고 촬영도 하고 뮤직비디오도 찍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하고 싶었던 연극이 아니라 매체 경력만 쌓게 되더라고요. 그때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매체 연기를 할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고요. 고민이 있던 찰나에 소속사에서 일본진출을 해보자고 해서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런데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고 무작정 일본으로 가니까 모델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소속사에서는 저를 방송인으로 키울 생각이었나 봐요. ‘내가 이런 거 하려고 일본에 있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학교 선배들이 극단 사계에서 뮤지컬을 하고 있으니까 오디션이라도 봐야겠다 싶었죠. 소속사에서는 뮤지컬 배우는 아무나 하냐고 했는데 운 좋게 합격했어요. 뮤지컬 경력은 그렇게 시작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뮤지컬과 연극 위주로 활동하게 되었죠.
어느덧 12년 차 배우가 되었어요. 요즘 느끼는 연기자로서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번도 없이 매번 연기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물론 저 자신에게는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완벽하다 싶었던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완벽한 연기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요. 연기를 더 잘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같은 명배우의 연기를 보면 전 아직 멀었다고 느끼죠. 연극 <리처드 3세>에서 황정민 선배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연기를 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껴요. 최근에 끝난 <록키호러쇼>에서는 사회생활에 지치고 힘들었을 관객들이 극장에서 소리 지르고 즐거워하는 걸 보면 오히려 제가 더 힘이 나더라고요. 그럴 때는 공연이 끝나도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저는 무대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배우일 뿐인데 관객들이 선물과 편지도 많이 주셔서 항상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무대 위에서 좋은 연기와 노래를 들려드리는 게 보답하는 법이고 배우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재능으로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나눠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하죠.
팬에게 받았던 선물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돌아서서 떠나라>가 끝나고 나서 사인을 하는데, 한 팬이 오스카 트로피를 주더라고요. 진짜 트로피가 아닌데도 받는데도 기분이 새로웠어요. 제가 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인데도 모형 오스카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진짜 오스카상을 받아보면 좋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상 소감으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환경문제와 세계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상상도 하면서요.
연기가 왜 좋은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라는 프랑스 배우가 연기는 치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굉장히 공감하는 말이에요. 저는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관객들의 마음도 위로해주고 스스로도 치유 받은 적이 많았거든요. 대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받았을 때도 연기를 하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아픔이 해소되기도 했고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과 상처가 있고, 트라우마도 있는데 연기가 그런 아픔을 위로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기가 좋아요.
그런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연출가가 되고 싶은 꿈은 없나요?
네. 저는 연출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어요. 연기자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려고요. 아내(박혜나 배우)는 연극 <경환이>도 연출하고 연기를 가르치는 것에도 뜻이 있더라고요. 저는 그런 아내를 힘닿는 데까지 외조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둘의 공통적인 꿈이 있긴 한데, 언젠가는 좋은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 꿈을 꾸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생일 때 학교 소유의 드라마센터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극장 시설이 정말 좋았는데, 나중에는 공간을 외부에 임대해서 학생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나중에 꼭 드라마센터 같은 곳을 지어서 후배들이 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제가 능력이 되는 날까지는 배우를 하겠지만, 언젠가 더 이상 못하게 되는 시기가 오잖아요. 그때는 동료들, 선생님들과 함께 제가 배운 연기를 가르치고 좋은 배우를 발굴하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배우로서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바람이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일단은 지금 출연하고 있는 <더 데빌>에 온 신경을 쓸 생각이에요. 작품이 끝나면 시간을 내서 멀리 여행을 좀 가고 싶어요. 결혼하고 3년이 되도록 먼 곳으로 여행을 간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계속 연기 공부를 해야죠. 제 안을 계속 채워야 연기자로서 가진 것들이 소진되지 않거든요. 연기든 노래든 멈추지 않고 계속해야죠.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 있다. 배우 김찬호가 그런 사람이다. 그가 카페의 문을 열고,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쌀쌀한 날씨에도 코트를 걸치지 않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슈트만 입은 모습은 흡사 그가 맡은 X블랙과 닮아 보였다. <더 데빌>의 X블랙은 지금껏 그가 연기한 배역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뮤지컬 <마마, 돈크라이>에서는 슬픈 사연을 가진 드라큘라 백작, <베헤모스>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패스 변호사, <더맨인더홀>의 지하에 사는 늑대 모두 인간과 거리가 있는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어려운 역할에만 도전하는 그가 이번에는 악(惡)을 상징한 X블랙을 연기한다.
<더 데빌>은 괴테가 쓴 소설 <파우스트>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소설 속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파는 주인공 파우스트 박사는 뮤지컬에서는 뉴욕 월스트리트의 성공한 주식 브로커로 각색되었다. 뮤지컬은 2014년 초연을 선보인 뒤, 신선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는 두 가지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설명적인 대사는 배제하고 최소한의 서사만 남겨둔 채 이미지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매번 낯선 역에 도전하는 배우 김찬호는 왜 하필이면 <더 데빌>을 선택했을까. 그 둘의 만남은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까.
작년에 콘서트에 출연해서 <더 데빌>의 넘버를 불렀던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른 배우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곡을 부르고 싶었거든요. 물론 <더 데빌>의 음악이 정말 좋기도 했고요. 극 중 그레첸이 부르는 ‘매드 그레첸’이라는 곡을 골랐는데, 그 곡 말고도 X블랙과 X화이트가 함께 부르는 ‘피와 살’이라는 넘버도 좋아요. 한두 곡만 뽑을 수 없을 정도예요. 뮤지컬의 초연과 재연을 다 봤는데, 언젠가는 작품 속 넘버들을 공연장에서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뮤지컬을 직접 본 관객의 입장에서 감상은 어땠나요?
노래의 음이 굉장히 높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조명이 현란하고, 음악이 좋다는 생각도요.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극의 드라마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지금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선과 악, 인간의 양면성과 욕망 등에 대해 공부하면서 연습에 참여하고 있어요.
작품이 신선하지만 어렵다는 평도 있었는데, 이번 시즌에 달라지는 점이 있을까요?
<더 데빌>의 메시지가 직접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서사보다는 이미지가 중심이 되다 보니 어렵다고 느껴졌을 거예요. 이지나 연출가님이 이번 시즌에서는 드라마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고 있어요. 한순간에 몰락한 주식 브로커 존 파우스트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끔 X블랙이 선택권을 주는데, 그런 상황에서 더 많은 고뇌를 하는 등 드라마를 강화하고 있어요. 넘버가 좋은 작품이어서 드라마가 보강되면 더 완성도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지나 연출가는 X블랙 역에게 어떤 연기를 주문하던가요?
보통 악이라고 하면 흉측하고 비합리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연출가님은 X블랙이 일차원적인 악이 아니라고 설명했어요. 지적이고 합리적이고 스스로 하는 일에 대해서도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예요. 관객들이 X블랙이 하는 행동을 보고 어쩌면 옳은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요. 또 노래를 부를 때는 가사에 모든 드라마가 담겨 있으니 노랫말이 잘 들리게끔 불러 달라고 하셨어요. 선율에 취하지 않고 말의 의도를 잘 담아서 부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예전에 뮤지컬 <더맨인더홀>의 늑대를 연기하기 위해서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캐릭터를 준비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X블랙을 연기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고 있나요?
제가 예전에 인상 깊게 봤던 영화 중에 <데빌스 에드버킷>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키아누 리브스와 알 파치노가 출연하는데,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변호사가 승승장구하다가 위험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이야기예요. 인물 관계가 <더 데빌>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최근에 다시 봤어요. 영화에서는 존 밀튼(알 파치노 분)이 X블랙과 비슷해요. 그 사람은 자신이 책임지지 않고 케빈 로맥스(키아누 리브스 분)로 하여금 계속 선택하게 만들어요. X블랙도 존 파우스트 혹은 그레첸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주면서 본인이 선택하게끔 만드는 것처럼요. 알 파치노가 나쁜 짓을 하면서도 악해 보이지 않게끔 연기하는데 ‘역시 굉장한 배우다’하고 감탄하면서 공부했죠.
X블랙을 맡은 다른 배우들과 김찬호의 X블랙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차지연 배우는 초연 때 그레첸 역을 맡았고, 이번에는 여성 배우 중 처음으로 X블랙 역할을 맡게 되었잖아요. 어떻게 연기할지 가늠이 안 되고 저도 많이 궁금해요. 임병근 배우는 첫인상과는 달리 감미로운 면이 있더라고요. 부드럽게 유혹하는 X블랙을 선보일 것 같아요. 저는 악해 보이지 않고 어느 편인지 헷갈리는 X블랙처럼 보일 거예요. 악인지 선인지 알 수 없는 X블랙이죠.
X블랙은 인간을 악하다고 믿고, X화이트는 선하다고 믿는데, 인간에 대한 김찬호 배우의 솔직한 생각은 어떤가요?
사실 저는 성선설을 믿는 사람이에요. 인간은 착한 것 같아요(웃음). 인간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어긋난 믿음을 가지거나 환경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악해지는 것 같아요.
인간이 아닌 역할을 주로 맡아서 별명도 생겼다고 하죠? 그런데 이번에도 악을 연기하게 되었어요.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궁금해요.
우선 말씀드리자면, 굳이 인간이 아닌 역할만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저의 이미지가 강한 개성의 캐릭터와 어울려서 그런 제안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작품이 세 개 정도 들어오면 지금 맡은 캐릭터와는 최대한 다른 캐릭터가 있는 작품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려고 해요. 그래서 <미인>에서는 일본인 형사를 맡았다가 <록키호러쇼>에서는 외계인 역을 연기했고, 지금은 X블랙을 하고 있는 거죠.
이미지 때문에 강한 역할을 많이 맡게 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있죠. 사실 저는 황정민 선배가 영화 <너는 내 운명>에서 보여준 가슴 절절한 연기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따뜻한 스토리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 그런 연기를 잘하고 싶은데 제가 가진 이미지가 있다 보니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에는 무리해서라도 연극 <돌아서서 떠나라>에 참여하기도 했던 거고요. 비록 건달 역할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맡은 역할들 중에서는 여리고 인간적인 캐릭터였거든요.
기회가 된다면 연기해보고 싶은 배역이 있나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지저스 역을 해보고 싶어요. 저의 이미지가 지저스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어서 어떻게 그려질지 궁금해요.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 역은 선과 악을 모두 표현하니까 매력적이어서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보고 싶어요. 최근에는 <프랑켄슈타인>을 봤는데 그 작품에서는 빅터와 괴물 역할 둘 다 욕심이 나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또 인간과는 거리가 있는 역할들이 많네요(웃음).
어릴 적부터 배우가 꿈이었나요?
아니요.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굉장히 내성적이라 앞에 나서지도 못했고요. 부모님이 제 성격을 바꾸게 하려고 웅변학원에도 보낼 정도였어요. 그래도 욕심은 많아서 학창시절에는 여러 가지를 다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공부도 잘하고 싶고, 그림도 그리고 싶고, 운동도 좋아했었어요. 고등학생 때는 축구선수를 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까지 받았는데, 부모님이 극구 반대해서 운동선수는 포기했죠. 그러던 어느 날 대학로에서 故 강태기 선생님의 연극 <검정고무신>을 봤는데, ‘아! 이거다’ 싶더라고요. 연기를 하면 다양한 인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배우가 되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던 건가요?
아니요. 처음에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고,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는 뮤지컬 시장이 많이 활성화되어 있지도 않았거든요. 일단은 연극배우가 되기 위해서 연극과에 진학했고, 나중에는 소속사에 들어가서 광고 촬영도 하고 뮤직비디오도 찍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정작 하고 싶었던 연극이 아니라 매체 경력만 쌓게 되더라고요. 그때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매체 연기를 할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고요. 고민이 있던 찰나에 소속사에서 일본진출을 해보자고 해서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그런데 일본어를 하나도 모르고 무작정 일본으로 가니까 모델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소속사에서는 저를 방송인으로 키울 생각이었나 봐요. ‘내가 이런 거 하려고 일본에 있는 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학교 선배들이 극단 사계에서 뮤지컬을 하고 있으니까 오디션이라도 봐야겠다 싶었죠. 소속사에서는 뮤지컬 배우는 아무나 하냐고 했는데 운 좋게 합격했어요. 뮤지컬 경력은 그렇게 시작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뮤지컬과 연극 위주로 활동하게 되었죠.
어느덧 12년 차 배우가 되었어요. 요즘 느끼는 연기자로서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번도 없이 매번 연기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물론 저 자신에게는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완벽하다 싶었던 건 없었던 것 같아요. 완벽한 연기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고요. 연기를 더 잘하고는 싶은데,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알 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같은 명배우의 연기를 보면 전 아직 멀었다고 느끼죠. 연극 <리처드 3세>에서 황정민 선배가 연기하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연기를 하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은 언제인가요?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껴요. 최근에 끝난 <록키호러쇼>에서는 사회생활에 지치고 힘들었을 관객들이 극장에서 소리 지르고 즐거워하는 걸 보면 오히려 제가 더 힘이 나더라고요. 그럴 때는 공연이 끝나도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저는 무대에서 연기하고 노래하는 배우일 뿐인데 관객들이 선물과 편지도 많이 주셔서 항상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무대 위에서 좋은 연기와 노래를 들려드리는 게 보답하는 법이고 배우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재능으로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나눠줄 수 있다는 게 행복하죠.
팬에게 받았던 선물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돌아서서 떠나라>가 끝나고 나서 사인을 하는데, 한 팬이 오스카 트로피를 주더라고요. 진짜 트로피가 아닌데도 받는데도 기분이 새로웠어요. 제가 상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인데도 모형 오스카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진짜 오스카상을 받아보면 좋겠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수상 소감으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환경문제와 세계평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상상도 하면서요.
연기가 왜 좋은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건가요?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라는 프랑스 배우가 연기는 치유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굉장히 공감하는 말이에요. 저는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관객들의 마음도 위로해주고 스스로도 치유 받은 적이 많았거든요. 대학교에서 연기 수업을 받았을 때도 연기를 하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아픔이 해소되기도 했고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과 상처가 있고, 트라우마도 있는데 연기가 그런 아픔을 위로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연기가 좋아요.
그런 연기를 끌어낼 수 있는 연출가가 되고 싶은 꿈은 없나요?
네. 저는 연출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어요. 연기자를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려고요. 아내(박혜나 배우)는 연극 <경환이>도 연출하고 연기를 가르치는 것에도 뜻이 있더라고요. 저는 그런 아내를 힘닿는 데까지 외조할 생각이에요. 그래도 둘의 공통적인 꿈이 있긴 한데, 언젠가는 좋은 인재들을 양성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 꿈을 꾸게 된 계기가 있나요?
대학생일 때 학교 소유의 드라마센터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극장 시설이 정말 좋았는데, 나중에는 공간을 외부에 임대해서 학생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거든요. 나중에 꼭 드라마센터 같은 곳을 지어서 후배들이 연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제가 능력이 되는 날까지는 배우를 하겠지만, 언젠가 더 이상 못하게 되는 시기가 오잖아요. 그때는 동료들, 선생님들과 함께 제가 배운 연기를 가르치고 좋은 배우를 발굴하는 게 중요한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배우로서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바람이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일단은 지금 출연하고 있는 <더 데빌>에 온 신경을 쓸 생각이에요. 작품이 끝나면 시간을 내서 멀리 여행을 좀 가고 싶어요. 결혼하고 3년이 되도록 먼 곳으로 여행을 간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계속 연기 공부를 해야죠. 제 안을 계속 채워야 연기자로서 가진 것들이 소진되지 않거든요. 연기든 노래든 멈추지 않고 계속해야죠.
출처: http://theartpark.co.kr/201811_%EB%B0%B0%EC%9A%B0%EA%B9%80%EC%B0%AC%ED%98%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