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인터뷰
7kg의 무게, 71개의 불규칙한 배열의 버튼. 독일의 종교 음악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아르헨티나의 사창가에서 탱고 연주에 사용된 악기, 바로 반도네온이다. 현대 탱고의 거장이라 불리는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난해한 연주법 탓에 악마의 악기라 칭하기도 했다. 반도네오니스트의 수는 한국에 많지 않으며, 직업적으로 활동하는 사람의 수는 겨우 10명 남짓. 그 중 한 명인 고상지는 10년 넘게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처음 이름을 알린 건 <무한도전>을 통해서였다. 정재형, 정형돈이 부른 ‘순정마초’ 공연에서 반주를 하면서 얼굴을 알렸다. 방송 이후 공연 요청이 많아졌고, 가수 김동률, 유희열, 이적의 앨범과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는 등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는 스스로를 부족한 재능을 가졌다며 말하지만, 이제는 반도네온을 검색하면 고상지가, 반대로 고상지를 검색하면 반도네온이 연관 검색어로 나올 정도로 대중적인 연주가가 되었다. 반도네온 연주자이자 작곡가가 되기까지 고상지가 걸어온 길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녀의 음악 인생은 카이스트 중퇴, 아시아를 대표하는 반도네오니스트 료타 코마츠 사사, 아르헨티나 유학 등 만화 속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하게 흘렀다.
반도네온의 어떤 매력에 끌려 반도네오니스트의 길을 가게 되었나요?
매력에 끌려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현실적인 이유였죠. 대학생 때 저는 피아노 연주와 작곡을 하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이미 잘하는 사람은 많았고, 만약 실력이 좋아도 돈을 벌기는 힘들 것 같아서 우울한 상태였어요. 그 무렵, 탱고를 듣고 반도네온이라는 생소한 악기에 관심이 생겼죠. 연주해보고 싶다기보다는 어떤 악기인지 궁금한 정도였달까요. 때마침 어머니가 아르헨티나에 여행을 간다고 해서, 반도네온을 보게 되면 사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가져온 악기를 연주해봤는데, 사람들이 호응을 보이더라고요. 반도네온을 연주하면 어쩌면 음악을 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가르쳐주는 곳이 없어서 연습하기도 순탄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길거리에서 공연하면서 혼자 익혔어요. 운 좋게도 학교 선배가 제 공연을 보고 반도네온 연주자 료타 코마츠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한국에 혼자 반도네온 공부하는 애가 있으니까 힘내라고 메일 한 통 보내주면 격려가 될 거라고요. 그런데 정말 제게 메일이 온 거죠. 저는 당장 “저를 선생님의 제자로 받아 주세요”하며 답장을 보냈죠. 그렇게 배우기 시작해서 3개월에 한 번씩 일본에 가서 3주씩 머물렀어요. 선생님을 통해서 반도네온의 매력을 더 알게 되었죠.
음악을 하기 위해 다니던 카이스트를 중퇴했는데 불안하지 않았나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계산이 빠르고 산수를 잘해서 카이스트에 들어갔는데, 그곳엔 정말 천재들이 많더라고요. 공부를 계속할 게 아니라면 이 학교를 계속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기 싫은 건 참지 않는 편이거든요. 앞날은 모르는 거고,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상관이 없었어요.
애니메이션이라는 음악적 근원
다른 인터뷰를 보니 음악할 때 애니메이션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을 좋아했어요. 만화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를 보면 전투 장면에서 극적인 효과를 주는 데 배경음악이 큰 몫을 하거든요. 그 만화의 음악을 정말 좋아해서 녹화해놓고 계속 돌려볼 정도였어요.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어서 우연히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을 들었는데 전투음악이 연상되더라고요. 그래서 탱고를 좋아하게 됐어요. 제가 <에반게리온>의 사기스 시로 음악감독 때문에 음악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분을 좋아하는데,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음악감독도 하셨더라고요.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은 첫 번째 앨범 <Maycgre 1.0>에도 담겨있다고요.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의 느낌을 담아 만든 앨범이에요. 앨범 타이틀도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마키나미, <에반게리온>의 아스카, <천원돌파 그렌라간>의 요코가 등 캐릭터 알파벳을 따서 지었어요. 수록곡 대부분도 캐릭터나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업했는데, 1번 트랙 ‘출격’은 <에반게리온: 파>의 마키나미 마리와 아스카를 떠올리며 썼고, ‘envy’는 <강철의 연금술사>의 엔비, <슈타인즈 게이트>의 크리스와 <에반게리온>의 아스카를 섞어서 ‘Red hair Heroin’으로 만들었어요.
1집을 발매하기 전에 ‘애니메이션 덕후’라는 걸 드러내기가 걱정되진 않았나요?
고민이 있었죠. 주변 사람들은 애니메이션에 관련된 어떤 얘기도 꺼내지도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 음악 작업을 같이 하면서 알게 된 유희열 선배와 이적 선배의 생각은 달랐어요. 선배들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라는 것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말해줬어요. 마케팅 차원에서도 더 좋은 작전이고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그 조언을 듣고 뮤직비디오도 모션그래픽을 이용해서 애니메이션 오프닝처럼 마음껏 만들었어요.
1집 앨범은 ‘출격’으로 힘차게 시작해서 ‘暗(암)’으로 쓸쓸하게 끝나요.
1집뿐만 아니라 3집도 그래요. 투지를 불태우고 마지막에 패배하는 그 정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비슷하잖아요. 저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노력하면 다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게 오히려 가짜 같이 느껴져요. 이기는 건 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패배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엔 승리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희망찬 이야기도 부담스럽고요.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도 여러 종류의 이야기가 있지만, 전 실패하는 이야기를 좋아해요.
3집에서는 패배하는 악당에게 헌정하는 곡들도 있어요.
네, ‘무한의 유피’ ‘성층권’ ‘Fuga for the three’ 세 곡이에요. <헌터x헌터>에 나오는 유피, 피트, 푸흐 세 캐릭터에 대한 곡이에요. 3집 이름이 <Tears of Pitou>이고, 피트의 눈물이라는 뜻이에요. 그 만화가 선과 악을 선명하게 보여주지는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피트는 악당에 가까운 캐릭터죠. 왕이라는 고귀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스스럼없이 바치는 왕직속호위군이에요. 피트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봤을 때의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말로 표현하는 순간 초라해질 것 같고,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었죠. 앨범 커버에 사용된 이미지도 피트를 떠올리게 하는 느낌으로 나타냈어요. 그 캐릭터가 뿜어내는 보랏빛의 기분 나쁜 오라(aura)가 있어요. 그 오라의 분위기와 <에반게리온>에 자주 나오는 전봇대와 하늘을 합쳐 표현했어요.
<헌터x헌터>의 세 인물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피트, 푸흐, 유피 세 캐릭터가 등장할 때는 곡이 정말 멋있어서 안 좋아할 수가 없어요. 그 음악만 나오면 넋이 나갔죠. 세 캐릭터는 작품 속에서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는데, 그 감정들을 3집에는 다 싣지 못했어요. 특히 셋의 감정뿐만 아니라 이들과 관련된 사람들, 3명이 모시는 왕과 왕이 좋아했던 인간 여자, 모든 것이 얽힌 감정이 저에게는 삶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장 깊고 고귀한 감정이었어요.
흔히 탱고라고 하면 남녀의 격렬한 사랑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아요.
네, 하나도 없어요(웃음). 제가 사랑을 통해서 영감을 얻지 않으니까요. 연애 경험이 많지 않고, 길게 해본 적도 없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의 순위가 낮은 것 같아요. 제 머릿속에는 ‘악기 잘하고 싶다, 음악 잘하고 싶다, 우리 고양이 귀여워, 이 음식 너무 맛있어’라는 생각들이 있고, 사랑이라는 건 더 밑으로 내려가 85위쯤에 있는 것 같아요.
반도네온 그 이상의 고상지
바이올리니스트 윤종수, 재즈피아니스트 최문석과 함께 탱고 앨범을 내기도 했습니다.
관객에게 반응이 좋았던 곡을 위주로 앨범으로 만들었어요. 공연을 하면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음악을 많이 선보였는데, 음반으로 듣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았거든요. 한편으로는 반도네온 연주자로 먹고살고 있는데, 반도네온의 색깔이 많이 들어간 앨범을 한번 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처음에는 가볍게 공연 레퍼토리를 담으려 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 하는 거 우리 색깔을 더 많이 넣어 볼까?’ 그래서 원곡보다 펑키하고 재즈 느낌이 나게 편곡했어요.
곡을 정하는 기준이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좋아하는 곡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제가 관객 출신이라 관객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나 봐요. 음악을 하기 전에 공연을 정말 많이 보며 살았거든요. 만약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했다면 아티스트만의 신념 같은 게 있을 수도 있는데, 저는 제 공연을 보는 관객과 음악을 듣는 분의 기분을 좋게 해주고 싶을 뿐이에요.
10월에 열리는 <슬로우 라이프 슬로우 라이브 2018>에서는 어떤 무대를 보여줄지 기대돼요.
저희가 공연하는 날의 테마가 영화 음악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에반게리온>의 OST를 연주하려고 해요. 그런데 같이 공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강이채가 그 애니메이션을 잘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강이채라는 다재다능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멋지게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제가 편곡을 하려고 합니다. OST 연주는 20분 정도이고, 이후에는 강이채, 최문석 그리고 저의 음악이 섞인 신나고 테크니컬한 무대로 꾸밀 예정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바로크 시대의 음악을 이어서 하고 싶어요. 나만의 새로운 것을 만들기엔 지구인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이 나온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피아졸라도 바로크 음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고, 최근에는 애니메이션 <데스노트>를 보는데 비발디의 음악이 활용되더라고요. 2년 정도 바로크 음악을 공부하면 다음 곡을 쓸 때 묻어 나오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