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해보려 한다. 한글과 영어의 조합. 아니, 정확히는 한자와 영어의 조합. 대한민국에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 말들이 많다. 미팅에서 파생된 소개팅, 번개팅 심지어는 노예팅까지. 하나의 목적으로 함께 공부를 하는 '스터디'에서 뻗어나간 밥터디라는 것도 있다. 엄연히 같이 밥먹는 자리에 스터디라는 말을 붙인다는 게 옳지는 않다. 그래도 뭐. 그들이 그런다니 그럴 수밖에. 어제부로 난 3년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정확히 일 년이 됐다. 일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소개팅을 주선해줬지만, 꿋꿋하게 거절했다. 이건 나의 신조이며, 소신이었고, 지나간 사람에 대한 적절한 예의였다.
3년 사귄 사람과는 1년이 휴식기, 2년 사귄 사람과는 6개월이 휴식기, 그 밑으로는 한 달이다. 3년을 사귄 구 여친과 3년이 되기 전에 먼저 헤어지자고 말해볼까 생각했지만 너무 배은망덕한 생각이라 접어뒀다. 2년 사귄 사람은 지금껏 없어서 그 규칙은 적용된 적이 없다. 2년 밑으로 사귄 사람은 꽤 있다. 이래뵈도 못생기지 않았다. 남들은 귀엽다고, 엄마는 잘생겼다고 말한다. 고로 잘생김과 귀여움을 한 얼굴에 담고 있는 사람이다. 이러니 친구들이 소개팅을 주선하지. 구 여친은 이미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 남자의 이름은 park tae hyun. 페이스북에서 뒷조사를 좀 했다. 언뜻보니(사실 자세히 봤다) 이 사람 꽤 못 생겼다. 구 여친의 새 남친이라 그러는 말이 아니다. 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니다. 눈은 찢어지고 입은 크고 코는 납작하고, 어떻게 나랑 헤어지고 이런 남자를 만나냐.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새 남친의 외모 밖에 못 보니까 어쩔 수 없다. 무튼, 난 일 년간의 자체 애도기를 지냈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니지만 기억 속 나의 그녀는 죽었으니 애도기를 가져야 함이 분명하다.
누구에게 자랑하려고 애도기 따위를 가지는 건 아니다. 그 사이에 여자를 만나봤자 금방 헤어질 것 같아서 이런다. 외로워서 만나는 사람들은 꼭 헤어지더라. 옆에 있는 사람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구 여친의 얼굴을 떠올리거나 비교를 하게 되거나. 3년 사귄 사람과 헤어졌으면 일 년은 지나야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애도기가 끝났음으로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만나볼까 생각중이다. 흑석동의 망나니로 다시 태어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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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소개팅을 하기 전에 나름 기준을 세웠다. 첫 번째, 구여친과 닮아서는 안 된다.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람을 만나야 한다. 3년 사귀고 헤어졌는데 또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이제 다른 사람 좀 만나야지. 두 번째, 키가 나보다 작아야 한다. 아마 모든 남자가 소개팅할 때 다는 조건일 게다. 난 키가 170cm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보다 조금 예민하다. 요즘 키 큰 여자들이 많아서. 그래서 이걸 조건이라고 달고 있다. 난 나의 아담한 키(라고 쓰고 작은 키라고 읽는다) 를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한 적이 없지만, 키 큰 사람 옆에 서면 주눅드는 건 사실이다. 주눅드는 감정은 부끄러움과는 다르다. 20cm나 더 큰 친구 옆에 서면(생각만 해도 싫다) 누구나 쪼그라들 게다. 188cm 남자가 208cm 남자 옆에 서면 그 느낌을 알지 않을까. 이런 조건을 달고 친구들의 소개팅을 하나 하나 접수하기 시작했다.
정윤지. 나이는 24살. 이름처럼 여자. 학생 기자 활동을 하다가 같은 동네에 사는 걸 알고 친해진 동생이다. 첫 번째 소개팅을 해준 고마운 사람이면서 '첫 번째'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게 된 친구다. 동네 카페에서 종종 만나는 사이.
"오빠, 소개팅해달라고?"
"응 해줘 해줘"
"그런데 소개팅이라는 게, 자판기에서 음료수 뽑아먹는 것처럼 누르면 나오는 게 아니야"
"알고 있지만 친구는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처럼 네 외모가 또 워낙 출중하니까. 친구 중에 한 명 아무나 소개해달라는 거지"
"이 오빠가 로버트 치알디니의 설득의 심리학을 읽었나. 오늘따라 설득력 좋네. 안 그래도 봄이라 주변에 외롭외롭열매를 먹은 친구들이 꽤 있긴해. 내가 한번 물어나 볼게"
"고마워 역시 윤지 밖에 없다. 아무나 해줘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청순큐티한 사람으로 부탁할게"
"헛소리 그만해"
이 대화가 끝나고 정확히 30분 뒤에 윤지는 '오빠 소개팅 ㄱㄱ'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렇게 첫번째 소개팅이 성사됐다. 첫번째 카톡 이후에 연달아 소개팅녀의 연락처가 왔고 신상정보가 몇 차례 더 왔다. 연락처를 받았지만 바로 연락할 수는 없었다. 이건 연애의 기본 원칙이다. 내가 안달나지말고 남을 안달나게 만들어라. 난 밤 11시에 카톡을 보냈다. 10시부터 11시는 여자와 폰이 멀어지는 시간이다. 이유는 드라마. 남자가 게임에 몰입하는 순간과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된다. 괜히 10시 30분에 카톡보냈다가 성의없는 답장을 받고싶지는 않다면 드라마 시간은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