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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Jun 17. 2020

군더더기 없는 생존스릴러, <#살아있다>

1.

준우가 게으르게 아침을 맞이한다. 밖으로 나갈 생각도 없이 곧장 컴퓨터를 켜고 게임에 접속한다. 그때 채팅창에서 정체 모를 감염자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듣는다. 영화가 시작된 지 고작 3분 정도 된 시점이다. TV를 켜니 폭력 성향을 보이는 감염자들이 도심에 출몰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창문으로 아파트 밖을 보니 아비규환이다. 주민과 자동차는 질서 없이 도망치다 부딪힌다. 누구로부터 도망치는 건지 파악되지 않을 때 한두 명의 감염자가 드디어 준우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거의 영화 시작과 동시에 재난이 시작된 셈이다. <#살아있다>는 속도감을 질질 끄는 법이 없다. 한국의 재난 영화를 떠올려보면 이렇게 감정적으로 건조한 전개는 낯설다.


2.

후반에 터뜨릴 눈물샘을 위해 초반에 밑작업을 해두기 때문이다. 영화 <해운대>, <판도라>, <부산행>, <백두산> 같은 영화를 보면 감정선을 터뜨리기 위해 주인공과 가족 관계 혹은 연인 관계를 강조해서 보여준다. '이들이 이렇게 서로 아끼지만 마음은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충 이런 메시지가 깔려있다. 그 부분에서 어떤 관객들은 신파적이라고 지적하고, 어떤 관객들은 울음을 터뜨린다. <#살아있다>는 이런 부분이 다르다. 준우(유아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워하긴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애틋한 가족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임신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준우가 불효자인 것도 아니다. 준우는 아버지가 남긴 "꼭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 한 마디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칠 정도로 아버지가 그립지만, 그뿐이다. 영화는 오직 준우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는 듯하다. 각본을 미국 시나리오 작가 맷 네일러가 썼는데, 미국인이 썼기 때문에 덜 신파적인 건 아니다. 조일형 감독이 각색까지 했기 때문에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신파를 넣을 수 있었다. 애초부터 가족 관계의 감정선을 건조하게 작업했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3.

많은 관객들은 <#살아있다>의 유아인을 기대하며 극장을 찾을 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는 생각이 달라 질지도 모른다. 유아인보다는 박신혜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거다. 박신혜가 맡은 캐릭터 유빈은 한때 클라이밍을 좀 했던 사람, 계획적이고, 준비성이 철저하며, 자신이 먹을 물 한 모금을 아껴서 식물에게 물을 주는 그런 사람이다. 침착하고, 눈썰미도 좋고 담력까지 있다. 이런 모습은 준우와는 정반대다. 준우는 상대적으로 멘탈이 쉽게 흔들리고,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이다. 멋진 장면은 박신혜가 다 가져갔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 역할을 하는 박신혜 그리고 박신혜를 서포트하는 유아인의 모습은 한국영화에서는 조금 낯선 모습이다. 게다가 힘 센 녀석이 살아남는 재난 영화(살아있다는 좀비 영화이긴 하지만 재난영화에 가깝다)에서 이런 캐릭터 조합이라니 생소하고 반갑다. 박신혜에게 치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캐릭터의 매력도 있지만 박신혜가 침착하고 담담한 연기를 맛깔나게 소화했다. 아웃도어를 입고 로프를 타고 낫(?)을 휘두르는 모습이 어울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물론 오랜만에 가벼운 캐릭터를 연기한 유아인 역시 힘을 뺀 모습이 반갑다. <베테랑>, <버닝> 때의 유아인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어준다.


4.

젊은 남녀가 나오면 로맨스를 넣고 싶은 심리가 있겠지만, <#살아있다>에서는 그런 부분이 빠져있다. 위에서 한번 말한 신파적인 부분도 없고, 로맨스도 없다. 준우가 자신 이외의 생존자인 유빈을 발견하고 뛸듯이 반가워하지만 그게 이성적인 이유는 아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은 거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제만 바라보고 직진한다. 이런 표현이 의아한가? 방 안에 갇혀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공간인데 직진이라니. 하지만 편집과 시나리오로 영화에 속도감을 불어넣었다.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


5.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창문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인 모습이 마치 교회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보인다. 준우는 교회 안에서 구원 받고자 했지만, 구원자는 건너편 단지에 있었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준우를 구해준 건 바로 유빈이다. 그렇게 살려낸 준우는 또 유빈을 구해준다. 재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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