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받아들이고 나로 살아가기
사실 제목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의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유튜버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고 사회와 교감하면서 나를 표현하는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회는 내가 어떠한 무언가가 되기를 원한다. 너는 ~회사 직원이야. 너는 ~학생이야. 너는 공무원이야. 너는 학교 선생이야. 너는 자영업자야. 너는 ~이야라고 하며 나를 무엇으로 정하고 내가 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한다.
물론 내가 이 사회에서 직업 또는 어떠한 정체성을 정하고 나를 규명하고 나를 정의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작업이 없다면, 내가 가진 것은 가능성 뿐이지 실제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셈이 되어 버린다. 하나의 직업이 생기고 내가 그 커뮤니티로 들어가는 것은 나에게 더 넓은 차원의 문을 열어주는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나를 그것으로 한정시키냐 아니면 온전히 나로 살아보느냐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라는 전체집합이 있다면 내가 규명하는 것은 그 전체집합속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 그냥 집합 A로 살아가도 괜찮은 사람이 있고, 자신의 집합을 더 넓히고 싶은 사람이 있다. 나는 나의 집합을 더 알아가고 싶은 사람이다. 그게 나답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거의 모든 운동을 다 좋아했고, 다양한 악기다루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외국어를 배우고 사용하기를 좋아했고, 다양한 학문을 배우는 것을 좋아했다.
커가면서는 약간 정체성의 혼란 같은 것도 오게 되었다. 일단 미국에 살면서, 어떤 인종의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지 부터, 나는 한국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미국인으로 살아갈 것인가 등 나의 관계속에서 정체성 결정의 힘듦이 있었다. 운동부도 여러개를 들면서 내가 "가장" 잘하고 나를 정의할 수 있는 운동은 무엇인가부터, 악기도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악기는 무엇인가 뭔가 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대학교 전공과 주 직업선정은 그보다 더 힘든 것이였다.
다양한 것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들은 나는 뭐를 "가장" 잘하고 좋아하를 정의하기 힘든 약간 그런게 있다. 그리고 사회눈 명확히 규명할 수 있는 자아상을 원하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필히 정체성의 혼란이 오게 된다. 나도 그것을 겪었고, 지금은 그러려니 하면서 지내고 있다.
성인이 되면 그것이 직접적으로 경제활동으로 이어지게되고 나의 존재적인 부분과 맞닿아지는 부분이 커지기 때문에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그 부분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할 것인가, 나는 인생의 어떠한 고급진 취미를 가질 것인가, 나는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할 때 나를 무언가로 정해놓고 살아가면 살기가 쉬워진다.
그리고 특별히 경제적인 부분에서 이제는 연금을 바라볼 수 없는 시대가 왔고, 부동산 가격의 급상승으로 급여로는 내가 희망하는 삶을 살기가 힘든 시대가 도래함으로 어떠한 부가수입을 창출해야 하며, 어떠한 루트를 통해 부가수입을 창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에도 나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나의 모든 부분을 가지고 이 부분을 해결해나가며 세상을 탐색하고 나를 만들어갈 생각이다. 그러다보면 사회와 교집합이 생기는 부분도 생기고, 내 집합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사회의 여러 집합에 겹쳐지게 될 때 나는 그것을 만족으로 살아가고 인생의 보물로 여기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