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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Jun 29. 2019

1. Prologue

(Week 0) 난 누구, 여긴 어디

6개월 전, 아내가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해외 MBA에 선발되면서 전례 없는 큰 고민에 휩싸이게 되었다.


'같이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10년 이상 제법 잘 다니고 있는 회사인지라, 주위의 걱정어린 만류도 있었고, 응원의 목소리도 적잖이 들을 수 있었다.


"다 내려놓을 수 있겠어? 지금까지 쌓아놓은 게 아까워서"

"넌 혼자갔었지 아마? 그런데 같이 가겠다니"

"당연히 가족이 우선이지, 뭘 고민해"

"요즘 회사 많이 힘든데, 참 좋겠네요"


경영학과 출신답게, 가야 하는 이유와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하나 둘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남편으로써, 아빠로서, 아들로서, 직장인으로서 주어진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위한 고려 사항들을 생각할수록, 결정의 범위가 좁혀지기는 커녕 끝없는 질문의 쳇바퀴 속에 고통스러운 결정장애 증상이 무한 반복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를 괴롭힌 코멘트는,


"그래, 세상이 변했으니깐..."


무슨 의미일까. 괜찮다는 뜻인지 안괜찮다는 뜻인지. 남들 하는대로 그럭저럭 결정하라는 건지 소신껏 결정하라는 건지. 격려인지 비아냥인지.




'이거참, 나는 ... 누구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식상함이 묻어나는 자문이지만 여지껏 40년을 살아보며, 13년의 직장생활을 충실히 해왔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확신에 차서 해본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대충, 남들처럼. 그렇게 40년을 돌이켜 보니 내게 묻어있는 뚜렷한 색깔이라는게,


"그레이 아저씨, 미스터 그레이"


10살짜리 딸아이 친구들이 날 이렇게 부르곤 한다. 친구들이 자주 놀러 오는데, 나를 볼 때마다 내가 회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옷장을 열어보니 대부분 회색. 아니면 남색.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차도 두 번째 차도 짙은 회색이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매력적인 아름다운 색깔이라기보다는, 무난해서 혹은 다른 어떤 색깔과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편이라서 였던 것 같다. 빛나지는 않아도, 쉽게 때 타지 않는 그레이.


두 달 이상을 고민해도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지만, 지금 나는 결국 미국에 와 있다. 그다지 당당하게는 못했지만, 1년간의 휴직원을 상신했고 우여곡절 끝에 승인을 받아냈다. 평균적인 기대수명과 직장생활의 절반 가량을 돈 현재 시점에서, 다양한 관계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역할을 되돌아보고, 현재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즐기며 앞으로의 인생을 상상해볼 생각이다. 거창하게 인생 계획 혹은 설계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 살아갈지 한 번쯤은 치열하게 고민해 본 후에야


'저는 ... 입니다.'


라는 인사말과 함께, 누군가와 한참을 웃고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비에 젖은 낙엽처럼 버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는데,  알고 보니 얘들도 참 화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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