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5) 어제까지의 글쓰기
일기와 독후감 숙제가 아닌, 최초의 진지한 글쓰기는 고등학교 시절 시작되었다. 하고 많은 써클중에, 남자고등학교에는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문예반에서 말이다. 사실 농구부는 일찌감치 드래프트에서 탈락했고, 연극반은 진지하게 임할 자신 없으면 돌아가라는 면박만 받은 채 쫓겨났고, 사진반은 왠지 불량학생만 득실거릴 것 같아 겁이 났기에 마지막으로 복도 끝, 가장 구석에 어두커니 자리 잡은 문예반의 문을 두드렸다.
무얼 쓰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반겨준 형들이 너무 좋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첫 질문은 "농구 잘하냐?" 였지만, 널부러진 책들과 선배들의 시화전 패널, 그리고 곰팡이 냄새가 자아내는 분위기는 왠지 나와 어울리는 곳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시를 쓰고, 시화전과 시낭송의 밤을 개최하였다. 천상병을 읽고, 기형도를 읽고, 이해는 안 되지만 이상을 읽고는 직접 쓴 습작을 돌려 보며 치기 어린 독설을 날려대던 학창 시절이 좋았다. 서예반은 우리의 글을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신문반은 우리의 글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 알량한 자존심이 좋았다. 단 두 편의 시만를 허락해준 학교 문집에 실렸을 때는 혹시 소질이 있나 하는 생각도 처음 들었다.
꽃 한번 피우지 못하고
뿌리째 썩어
남은 잎이 메말라 버린 나무를 보면
가끔은
안아주고 싶다
다시 보면 오그라드는, 온라인 탑골공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세기말 고교 감성은 대략 이렇게 시작했었다. 당시 난 '가끔은'을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며 혼자 몇 주나 끙끙댔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곧 달콤한 고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두번째로 접한 진지한 글은 다름 아닌 보고서였다. 처음 경험한 보고서 관련 업무는 직장 내 꼰대 문화의 최고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단어 하나 잘못 선택했다고 온갖 모욕적인 말을 듣고, 줄 간격 맞추지 못했다고 기본이 안된 사람 취급을 받았다. 별 개선도 없이 금새 버젼 18까지 가고야 마는, 보고서로 승부하고자 하는 그 세계가 마치 종이로 지은 집 마냥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는, 특히 조직내 큰 의사결정에 가까운 업무를 맡게 되고 나서는 그 꼰대 문화 속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작품에 매료된 적도 있었다.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 명료함 속에 숨어있는 설득력. 과정 상의 고통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다는 결과는 여타의 예술작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문학이 감동과 공감의 세계라면 직장은 설득과 실행의 세계라는 차이는 있지만,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어디서든 빛이 난다.
휴직을 하고 나서는 시간이 없어 시작하지 못했다는 말은 단지 핑계가 아닌 명백한 거짓이 되어버려, 평소 늘 가슴으로만 품어 왔던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 무렵, 40대에는 내 이름으로 책을 펴내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어떤 책을?'이라는 질문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했고, 때마침 갑작스레 찾아온 유학 기회로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어 그 꿈을 흐지부지 가슴에 묻어둔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부담스러운 질문은 어김없이 찾아왔지만,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무엇이든'으로 풀어나가는 중이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면 그저 무엇이든, 일단 시작해 보는 수밖에.
에세이를 쓰다.
첫번째 에세이는 남들에게 공개하고 싶은 일기이다. 스스로의 삶을 기록하고, 그 가운데 의미를 찾고, 끝으로 행복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는 에세이. 다른 분에게는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에세이를 쓰고 싶다.
일기를 쓰는 훈련은 이미 많이 해본지라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공감이라는 말이 주는 중압감이 상당하다. 공감이 없는 에세이를 쓰면 악령들이 나타나 '그런 건 네 일기장에나 써!'라고 면박을 줄 것만 같아 두렵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쓴 몇 편의 에세이는 꽤 큰 자기만족을 주었고, 몇 편은 누군가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글과 남들이 좋아할 만한 글 사이에 고민이 될 때가 많은데, 이 문제도 풀어나갈 답을 하나 발견하였다. 둘 다 쓰면 된다, 번갈아가며.
두번째 에세이는 칼럼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니 어떠한 일에 불편함이 느껴질 때면 그에 관해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어떤 고수들은 완벽한 논리로 보는 이를 꼼짝 못 하게 압도하거나, 은유와 상징으로 보는 이를 홀린 뒤 촌철살인으로 마무리짓는다. 우리는 흔히 그런 분들을 전문가 혹은 귄위자라 부른다. 반면, 내공이 부족한 칼럼니스트는 애매한 논리로 의구심만 자아내며 불특정 다수에게 시비를 걸다가, 느닷없이 훈계를 한다. 다시 보니 내 글이 그렇다. 그렇다고 세상을 향한 관심의 끈을 놓기는 싫다. 꾸준히 읽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신중히 써야 할 노릇이다.
세번째 에세이는 여행기이다. 여행을 좋아하니 여행기는 빠질 수 없는 주제이지만, 어설프게 지역 정보를 나열하거나 맛집을 소개하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았다. 내 분야, 내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김영하 작가님께서 쓰신 '여행의 이유'에서와 같이 어떤 에피소드와 삶의 의미를 그럴듯하게 버무릴 줄 알아야 내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다. 글을 쓸 것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떠나니 여행의 풍미도 조금 더 깊어진다. 다만 기어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날에는, 오롯이 여행만 즐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객을 전도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단편 소설을 쓰다.
김애란 작가님의 글을 읽고, 그중에서도 특히 '바깥은 여름'을 읽고 언젠가 단편 소설을 써보겠다는 막연한 의지가 사그라든 적이 있었다. 감히 나 같은 사람이 함부로 도전할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 짧은 이야기 속에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세계를 담아낼 수 있을까?
그런데 시간이 생기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인슈타인 아니면 공부를 포기해야 하나? 그렇다면 삶은 또 무슨 이유로 포기할 텐가? 일단 써보자. 한편, 두편. 막상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재미있다. 물론 어렵지만.
일상이 단조로워져 에세이를 쓸 컨텐츠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 순간에는, 상상이든 공상이든 몽상이든 무언가를 지어낼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있다. 몇 달 뒤 복직하면 에세이 주제는 온통 회사 욕 아니면 가족에 대한 그리움 아니겠는가? 그런 순간에 픽션은 좋은 양념이 될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든다. 내가 재미있으면 다른 누군가도 재미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써야겠다. 비록 아직은 글 자체보다는 글 쓰는 일이 재미있는 수준이긴 해도.
동화를 쓰다.
솔직히 만만하게 봤다. 이 세상 모든 동화작가님들께 사과드릴 일이다. 아이들, 특히 초등학생 정도 나이 때의 아이들과 노는 게 즐거우니 나의 정신연령이 아이들 수준에 맞춰져 있다고, 그래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쓸 수 있겠다고 착각했었다. 최소한 내 아이는 재밌게 읽어줄 거라 자신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써보면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나온다. 하나같이 유치하고, 어색하고, 아무런 감동도 없다. 그림이 필요한지, 어느 정도의 나이 때에 적합한지, 이 정도 분량이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그 어떤 감도 없이 쓰는 건 말 그대로 무모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동화를 거의 읽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읽을 생각은 거의 없다. 몇 주간 끙끙대며 쓴 초고를 아이에게 보여줬을 때의 일이다.
"OO야, 아빠 동화 썼는데 한번 볼래?"
"응, 무슨 얘기야?"
"다람쥐랑 친구가 되는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야."
"우와 재밌겠다~!"
"다 읽었니?"
"응. 근데 왜 이렇게 길어?"
"응? 공모전에 낼건데 40쪽 이상 써야 한대."
"그림 없어?"
"응 그림책 부문도 있긴 한데, 아빠가 쓰는 건 글만 있는 동화야. 재미없어?"
"재미없는 건 아닌데..."
"사실 아빠도 처음 써본 거라, 재미없을 거 같기는 해."
"괜찮아. 다른 분들도 다 비슷할 거야..."
멋모르고 덤빈 공모전을 끝으로, 아이에게는 글 말고 다른 것으로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시를 쓰다.
시를 쓰는 것은 보고서를 쓰는 것만큼 고통스럽다. 이는 둘 간의 과정상 공통점에 기인하는데, 정제된 언어로 가능한 간결하고도 리듬감 있게 써야 하며 쓰고 읽고 고치는 과정을 무한 반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제 만족스럽게 쓴 문장은 어제 보면 장황하기만 하고, 어제 쓴 화려한 표현은 오늘 보면 유치하기만 하다.
아직은 고통에 비해 즐거움이 크지 않지만, 그렇다고 끈을 놓고 싶지는 않다. 거울 속 아름답지 않은 얼굴을 보면 팔자려니 생각하고 고칠 생각이 들지 않지만, 글은 아름답게 고쳐 쓰고 싶기 때문이다.
쓰다 보니 하나같이 쓰다. 하지만 에스프레소가 쓰다고 시럽을 때려 넣을 수는 없는 노릇. 자꾸 쓰다 보면 그 쓰디쓴 향기에 취하는 날이 올지 모르니, 언젠가는 책을 펴낸다는 달콤한 꿈을 꾸며, 계속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