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14) 어디 끼지 않은 사람 손!
90년대말 '왕따'라는 말이 신조어로 등장하고, 이내 널리 확산된 바 있었다. 사실 어떤 집단 내에서의 따돌림은 그것을 표현하는 말의 유무와 상관없이 늘 존재했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해서, 더욱이 조금은 튀는 행동과 함께, 혹은 그저 만만한 상대로 지목된 누군가는 늘 따돌림의 타겟이 되기 십상이다. 일본어 이지메를 대신해 한국 청소년들 사이에서 집단 따돌림을 뜻하는 은어로 사용되기 시작된 왕따라는 말은 하나의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 널리 확산되었고, 그 결과 '따돌리는 일, 또는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2008년 표준국어대사전에 등록되었다.
왕따라는 말의 확산과 더불어 왕따 문화도 널리 확산되었다. 최초 학교 안에서 시작된 이 말은 곧 회사, 군대, 심지어 가족 친지를 가지리 않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집단이 형성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등장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회 현상과 그것을 설명하는 말의 등장은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며 점차 몸집을 키워 나갔다. 선후 인과의 오류라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나는 왕따라는 말의 확산이 점차 보편화되어간 왕따 문화의 확산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널리 사용되어 어느새 일상에 자리 잡은 왕따라는 말은 처음 등장하던 시절에 비해 크게 심각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어떤 경우에는 마치 그것이 늘상 있는게 당연한 일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말이 가진 힘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새로운 사회 현상의 등장은 대개 새로운 말을 형성하는데, 이는 특정 세대를 나타내는 말에도 흔히 적용된다. 베이비 부머 세대, 386 세대, X-Y-Z 세대, 밀레니얼 세대 등 세상이 변하는 속도에 맞춰 새로운 세대는 늘 등장해왔고, 그 세대를 표현하는 새로운 말도 늘 뒤따라왔다. OO 세대라 이름 지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그 집단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기업에서는 이를 종종 마케팅에 활용한다. 또한 세대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특정 세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올해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90년대생이 온다'의 경우에도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는 현상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다양한 세대에 걸쳐 큰 공감을 얻고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 특히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어떤 분들은 '낀세대'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갑자기 등장한 말은 아니지만, 최근 들어 기사나 칼럼을 읽다 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내가 속한 80년대생이라는 세대도 대표적인 낀세대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어딘가 끼었다'는 부정적인 어감과 그에 따른 위기감으로 낀세대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대중의 이목을 끌기 쉽다. 이는 대한민국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말이 주는 위기감과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OO 세대가 이해와 공감을 형성하는 말이라면, 낀세대는 갈등과 대립을 조성하는 말이다. 안그래도 세대간 갈등의 골이 점점 깊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낀세대라는 말은 자주 쓸수록 더 큰 갈등을 확산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일자리 혹은 부의 형성 및 분배 문제처럼 주로 밥그릇 싸움 이슈에서 세대간의 갈등은 점점 흔한 일이 되어가고 있고, 그에 따라 낀세대라는 말도 점점 더 자주 들리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하지만 최초의 인류 혹은 종말을 목전에 둔 상황이 아닌 이상 낀세대가 아닌 세대가 어디 있겠는가. 보는 시각에 따라 그 어떤 세대라도 피해자도, 가해자도 될 수 있다. 물론,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냉정히 진단하고 상생을 도모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특히 오늘날 청춘으로 살아가는 세대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포기' 관련 신조어에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글을 보면 느껴지는 바가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자극적인 뉘앙스로 갈등을 판매하는 건 아닌가 하는 삐딱한 생각이 든다. 말이 가진 잠재력은 사용하기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