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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Mar 10. 2020

64. 바다를 건너간 백 장의 마스크

(Week 37) 우리가 살아가는 애매한 세상


1.

누군가 오늘날을 '코로나 시대'라 부르고 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 바이러스의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을뿐더러 시대라 부를 만큼 장기간에 걸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차분히 돌아볼 때면 한 장면도 그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우니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시대가 실제 도래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기력해진다. 경쾌한 리듬으로 한발 두발 내딛고 싶어도 몇 주 째 그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도돌이표를 따라 돌아오고야 말아, 나의 바람과는 달리 지금 어떤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하기 애매하다. 한편으로는 어떤 시대라는 규정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기에 그 또한 애매하기만 하다.



2.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공포감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2008년이었다. 미국 모기지 채권의 부실화로 촉발된 금융 위기는 당시 세계 금융시장을 선도하던 선진 금융기관을 줄줄이 도산하게 만들었고 그 영향은 삽시간에 미국을 넘어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당시 나는 리스크 관리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간밤에 미국에서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국내 금융시장과 내가 몸담은 회사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지 걱정부터 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무언가 일은 계속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해 답답했었다. 그 일의 끝이 있기나 한 것인지 알지 못해 절망스러웠다.



3.

세상 구석구석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는 몇 달간, 그에 따른 직간접적 여파는 몇 년 간이나 이어졌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상이 생각만큼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미친 직접적인 영향은 한동안 이어진 야근과 몇 차례 생략된 연말 성과급이 전부였다. 하지만 조금 더 관심 있게 주위를 관찰해보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었을 테고, 가족과 친구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더욱 고통스러웠을 테고, 그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음에 무기력함을 느꼈을지 모른다. 실제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지 모른다. 내 인생의 중심에 내가 있음은 명백했지만 나의 눈으로 세상을 판단하려 하다 보면 언제나 애매한 구석이 존재해왔다. 나는 나보다 심했을 그들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4.

십여 년 전 한국에서 매일 새벽 미국 뉴스를 보며 마음을 졸였듯이 요즘은 미국에서 매일 새벽 한국 뉴스를 보며 마음을 졸이고 있다. 마음을 졸여봤자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조금은 잠잠해졌다는 소식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족, 친척, 친구들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매일 갑갑한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는 상황에서 나만 자유로운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안함을 느껴봤자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더라도 공감이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원소 중 하나라고 믿고 있기에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지가 않다.



5.

마스크나 손 소독제를 사재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작 필요한 곳으로 배분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면 인간의 이기심에 혀를 차면서도,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생존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해의 이면에는 다시 한번 애매함이 존재한다. 얼마 어치를 사면 적절한 자기 방어 목적이 되고 그 이상을 사면 사재기인지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행의 확산 속도와 기간,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전제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만약 아는 누군가가 평소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생활하다가 전염되었다고 좌절한다면, 과연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만에 하나라도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이 생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차단하고자 노력하는 게 당연한 건지, 지나친 건지, 애매하다.



6.

연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던 시선과는 달리 미국에서도 확진자와 사망자의 숫자가 서서히 증가하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연일 뉴스의 헤드라인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전문가들의 권고와 마찬가지로 항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보다는 자주 손을 씻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내가 살고 있는 애틀랜타에서도 마찬가지의 행동 지침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스크 착용에 대한 권고는 없고 대신 수시로 20초 이상 손을 씻으라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아시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사람들이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했고, 손 소독제를 구하기가 어려워졌고, 일부 생필품의 사재기 현상이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7.

전문가의 권고 사항에 귀 기울일 필요는 있겠지만 그와는 다른 전문가의 관점이 있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만약 그렇다면 누가 더 전문가인지 판단할 능력이 안되기에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또한 애매하다. 가짜 뉴스가 판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식별하기 어렵다. 아직은 극소수만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지만, 만에 하나 중국이나 한국 혹은 이탈리아와 같이 무서운 속도로 확산한다면 과연 커져가는 공포로부터 미국인들도 자유로울 수 있을지 섣불리 짐작하기 어렵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이곳 애틀랜타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한다면 지금과 같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특정 나라의 국민들이 겪어온 경험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공포감의 차이, 뭐가 맞다고 속단하기 애매하다.



8.

도처에 애매함이 도사리는 이유는 결국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원인을 모르고, 영향을 모르고, 따라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최선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최악을 상상한 뒤 그것을 회피하려는 행동을 하거나, 최소한 주변을 살펴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 따라가는 것이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어주기도 한다.



9.

온통 애매함 뿐이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기는 한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그런 애매함을 안고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신의 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학에 진학했고, 재무제표 뒤에 감춰진 속사정이 어떤지, 어떤 괴팍한 상사가 기다리고 있는지 예상하지 못한 채 회사에 취직했으며, 함께 살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들이 벌어질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결혼이라는 큰 결정을 해버렸다. 그 기쁨에 버금가는 고통을 인지하지 못한 채 아이를 낳았고, 진짜 최악의 상황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경고를 받지 못한 채 퇴직을 하거나 이혼을 하기도 한다. 전혀 모르는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생전 처음 보는 음식에 도전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 그렇게 모르고 결정해도 괜찮다는 안도감, 설사 잘못된 선택이라도 다시 기회가 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그럭저럭 살아가진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면 좋건 싫건 간에 지금까지의 경험과 주어진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을 해야만 하고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해오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우리는 이미 익숙하다. 이미 수십 년을 그저 그렇게, 그럼에도 해야 할 오늘의 일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갔기 때문이다.



10.

연일 불안한 소식이 이어지지만 그래도 하던 대로, 지금 할 일을 찾아서 하나씩 해나가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불안해도 그저 손 열심히 씻으며 일상을 이어 나가고, 최소한의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되 날이 좋으면 가끔 공원 산책도 하고, 전보다 자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을지, 혹은 없을지 모르더라도 그로 인한 안도감을 느끼시게 해 드릴 수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보내드리면 될 일이다. 멀리 미국에 사는 아들이 효자 노릇 한다고 주위에 자랑할 거리 하나 안겨드리면, 그로 인해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답답한 일상 속에 몇 번이나마 더 웃음 짓게 해 드리면, 그리하여 마스크의 답답함 대신 가족의 포근함을 느끼실 수 있도록 도와 드리면 될 일이다.


그저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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