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38) 뜻밖의 선물
4년 전 미국에서 MBA 과정을 수강하고 있을 당시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서울에 남아있었다. 아내의 휴가, 혹은 나의 방학을 활용해 우리는 일 년에 두어 번 만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간들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빠르게만 흘러갔다.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물을 괴어도 그 새어나감을 어찌할 수 없듯이. 그렇게 눈 앞에서 사라지는 물을 무기력하게 바라본 것처럼, 며칠이라는 주어진 시간 속에 미리 계획한 몇 개의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작별의 순간은 금세 찾아온다.
그리고 그 헤어짐을 앞둔 순간, 대개는 마지막 날 아이는 잠들었지만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 순간에 나는 아이의 자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곤 했다. 자는 아이를 깨워 좀 더 얘기하거나 놀 수는 없지만 그 새근새근 한 숨소리라도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이렇게 컸냐며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껴보기도, 얼굴 구석구석, 심지어 코 고는 소리에서도 나와 닮은 면을 찾아내기도 하다 보면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시간이 주는 의외의 즐거움이 있었다. 사실은 끝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 그어둔 시간 속에서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 그 영상을 보며 다시 돌아온 혼자만의 시간을 버티기도, 반대로 그것을 보며 더더욱 외롭기도 했지만 그것은 분명 특별한 선물이었다.
애틋함은 그런 사소한 순간에 특히 더 또렷하게 관찰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올해, 아내의 MBA로 다시 돌아온 미국에서 나는 마지막 봄을 맞이하는 중이다. 인위적으로 구분한 시공간의 경계선을 따라 만들어낸 '마지막'이라는 말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일찍이 경험했음에도, 가까운 시일 내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은 있지만 다시 돌아올 계획은 없기에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말은 그나마 그 어리석은 '마지막'이다. 이 봄이 지나가면 나는 정해진 휴직 기간이 종료되어 한국으로 돌아가 복직할 것이고, 아내와 아이는 1년 더 남아 각자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1년이라는 헤어짐이 예정되어 있다. 미국의 학사 일정은 가을에 시작하여 봄에 끝나기에, 세상 모든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는 듯한 한국의 봄과는 달리 미국의 봄은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봄의 파릇한 새싹은 대부분의 경우 시작을 알리는 클리셰지만 이런 특별한 상황 때문인지 최소한 올해의 내게 봄은 작별의 알람이 되어버렸다. 병상에 누워 점차 사라져 가는 잎새를 바라보며 세상과의 이별을 준비했던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 존시와는 반대의 상황에 처한 셈이다. 그런 존시에게 떨어지지 않을 나뭇잎을 선물해준 이웃 화가 베어먼이 있었다면, 내게도 시간의 확장을 가능케 해준 뜻밖의 소식이 도착하였다. 바로 아내와 아이 모두 당분간 모든 학교 수업을 온라인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의 이메일이었다. 미 연방 정부의 국가비상사태 선포와 더불어 조지아주 애틀랜타 인근 대부분의 카운티에도 휴교령이 내려진 것이다. 시간의 양적 개념이 아닌 질적 개념을 건드렸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봄이 온다는 아쉬움이 무색하게도 앞으로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남은 두어 달의 학기 내내 온 가족이 종일 집에 갇혀 지내게 되었으니 아내, 아이와 함께 부대껴야 할 시간이 갑절로 늘어나버린 셈이다.
뜻밖의 선물이다.
사실 세계를 마비시키고 있는 전염병의 유행과 그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휴교령이 선물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당분간 이어질 테고, 하루빨리 학교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도 학교가 당분간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종일 뭐하며 지내지?'였으니 기대보다는 걱정의 마음이 몇 배는 더 컸던 게 사실이다. 아무리 소중한 시간이라 해도 함께 하는 시간에 비례해 늘어날 갈등 또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락을 싸야 하는 번거로움은 잠시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한 삼시세끼의 고통이 분명 찾아올 것이다. 야심 차게 준비 중인 다음 여행 역시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위기에 처해버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온 가족의 미국행을 결정한 가장 큰 계기 중 하나는 아이의 교육이었으므로 학교 교육의 온라인 전환은 휴직이라는 결정 하에 오늘을 살고 있는 목적 자체를 불식시키는 중차대한 사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차분히 곳간을 채우고 내일을 준비하는 것은 어느 정도 무뎌진 마음 덕분이다. 지난 수십 년간, 올해는 진짜 위기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온 덕분인지 정작 큰 위기가 찾아와도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훈련되었나 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자락에는 몇 해 전 가족과 다시 떨어지기 직전의 그 순간, 아이의 숨소리를 녹음하던 경험이 떠오른다. 지금이 얼마나 가치 있는 순간인지를, 그리고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 되고 안 좋게 생각하면 한없이 안 좋은 일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그것이 지금까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나의 인생에 그나마 터득해온 잔기술 일지 모른다며, 불쑥 배달된 뜻밖의 선물을 뜯어볼 시간이다.
건강히 잘 지내자 우리 가족.
그런데 우리, 내일은 또 뭐해 먹지?
* 미국 도처에서 발생하는 사재기를 보면 '결국 사람은 다 똑같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이라는 무의미한 양분, 이성적이다 미개하다 따위의 초점 없는 논쟁에서 벗어나 결국은 공포에 대한 경험의 차이 정도라고 믿고 싶다.
** 그럼에도 무척 인상적인 것은 컨틴젼시 상황하 시스템 전환이 상당히 빠르고 체계적이라는 점이다. 어느 정도 사전 준비해 왔겠지만, 교육청의 발표 이후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아 향후 과목별 학습 내용, 과제, 커뮤니케이션 방법과 더불어 저소득층 가정에 대한 지원방안 등이 일사천리로 공유되고 있다. 역시 일부 지도층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사회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