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39) 당연한 사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오이를 먹는 사람,
못 먹는 사람.
그리고 우리 집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
어려서 거의 매일 밥상에 오른 오이지를 즐겨 먹고, 고깃집 애피타이저로 쌈장을 듬뿍 찍은 생오이 서너 조각쯤은 거뜬히 먹어 치우고, 가장 좋아하는 김치가 오이소박이였던 나로서는 후자를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물론 초록 바탕에 오돌돌 한 겉모습이 다소 혐오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수분 가득한 내면의 아삭함과 여느 채소도 감히 넘보지 못할 청량함에 나는 오이를 즐겨 먹었고, 그것을 절대 입에 대지 않는 아내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언젠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기사가 읽은 적이 있었다. 그들만이 가진 어떤 유전자로 인해 오이가 내뿜는 특유의 향이 유독 역하게 느껴진다는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즐겨 먹는 고수를 유독 한국인이 싫어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한다. 얼마나 공신력 있는 연구인지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이해할 길이 없었지만, 구체적인 과학적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하니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 줄의 의구심이 내 마음속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결국 나는 아내를 이해하지 못한 셈이었다.
'거 참, 오이에서 무슨 향이 난다고...'
그런데 그런 아내와 10년 이상을 살다 보니 이해를 할 수 있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제는 김밥을 주문할 때면 내가 먼저 오이를 빼 달라 말을 하고, 혹시라도 그 말을 잊은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젓가락으로 오이를 골라내서는 내 접시에 담아 먹는다. 즐겨 찾는 춘천의 막국수집에서는 대개 채 썬 오이가 듬뿍 올려져 나오기 때문에,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아도 내 접시로 옮겨 담아 아내는 오이 없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오이를 두 배로 즐기면 그만이다.
어느새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아서 움직이고, 더 이상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니 애당초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불필요한 노력 없이도 충분히 슬기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나는 그 못생긴 오이를 통해 확인하였다. 한 명이 음식을 차리면 다른 한 명은 말없이 설거지를 하는 게 당연한 사이. 가끔은 아주 차가울 때도 있지만, 대체로 서로의 체온마저 닮아버려 온탕에 몸을 담근 것처럼 편안해진 그런 오랜 친구 같은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교과서에서 배운 그대로다. 현대 파이낸스의 근간을 이루는 포트폴리오 이론에 따르면 상이한 성격의 자산을 섞어야 비로소 위험을 줄이는 동시에 안정적인 수익률을 거양하는 효과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는 비슷한 성격을 가진 자산군 안에서는 아무리 분산한다 한들 포트폴리오 개선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가령 아마존 주식과 월마트 주식을 사는 것보다는 아마존 주식과 코카콜라 주식을 사는 것이, 두 종목의 주식만을 사는 것보다는 한 종목의 주식과 한 종목의 채권을 사는 것이 우월한 전략이라는 의미이다. 몰빵 투자가 아닌 최소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그 목적이 위험 대비 수익률을 높이는 데 있다면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이다.
부부가 남과 여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라면 부부간의 다름은 불화의 씨앗이라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며 안정적으로 가계를 운영하는 동인이 되어줄지 모르고, 그런 의미에서라면 단언컨대 우리 부부는 꽤나 잘 만난 한 쌍에 해당한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외향부터 속내까지 닮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MMF의 일간 수익률까지 찾아보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한 번 묵혀둔 투자는 좀처럼 들여다보지 않고 이미 지나간 일로 치부한다. 극단적인 소심함과 대범함이 만나 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고기류를 선호하며, 뭐든 한 개씩 사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필요하다면 한 번에 여러 개를 산다. 읽고 쓰기를 즐기는 나와 달리 아내와 좀처럼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 함께 늙어가기는 하나 그 모양새마저 상이하여, 한 명은 빠지고 다른 한 명은 색이 바래어 간다. 점점 염색이 잦아지는 아내를 볼 때면 나는 흑모백모라며, 오히려 은근한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이해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이해하지 못할 일들만 눈에 들어오지만, 막상 그 노력을 포기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그리하여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나가는 사이. 그래서 말없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당연한 사이. 아주 잘 살지는 못할지라도, 그럭저럭 큰 사고 없이 일상의 행복을 공유하는 사이. 하지만 문제는 이런 역학을 잠시 망각할 때 발생하고야 만다.
팬데믹에 대한 공포가 온 세상을 뒤덮기 직전 우리는 약간의 여윳돈을 각자 나누어 투자해 보기로 했다. 아내는 보나 마나 주식에 모조리 넣을 테니 나는 채권에 넣었어야 했다. 그 생각도 잠깐 했지만 결정의 순간 나를 움직인 것은 첫째는 세상에 대한 과도한 낙관, 둘째는 성과에 대한 욕심이었다. 힘든 시기일수록 저마다의 강점으로 서로를 지탱해줘야 하건만, 함께인 이유를 망각한 채 잘못된 판단을 내려버린 것이다. 그 결과 값비싼 수업료를 내고도 얻은 것이라곤 고작, 이미 알던 사실의 복습 정도.
'나라도 채권에 넣었어야 했는데, 조금 더 안전한 자산에 투자했어야 그나마 선방할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후회하는 나와는 달리 그러거나 말거나 아내는 당분간 거들떠보지 않을 거라 하니, 돌고 돌아 생각해도 꽤나 잘 만난 한 쌍이라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