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40) 아빠의 여성학 개론
2000년 가을, 대학교 2학년 2학기 때 여성학 개론이라는 과목을 수강하였다. 수많은 교양과목 중 하필이면 왜 여성학에 눈이 갔는지, 20년 전 일이니 정확히 기억날 리 없겠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조금 쿨해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새로운 밀레니얼의 도래와 함께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때였으니 나도 그 정도 상식은 있다, 깨어있는 남자다, 이런 시선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어떤 내용의 수업이 진행되었는지는 왜 그 과목을 들었는지와 마찬가지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이라곤 수업을 들었던 그 당시에도 여성학 개론이 무슨 내용의 수업이었는지 몰랐다는 것, 그 정도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를 국내 여성학의 1세대라 칭하신 교수님께서는 시종일관 화가 가득한 톤으로, 교과 내용의 전달보다는 마치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러 강의실에 들어오시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오신 첫 순간부터 화가 나 있었거나, 혹은 처음에는 잠시 평온했지만 이내 안 좋은 어떤 기억이 떠오른 사람처럼 점점 화가 차올랐기 때문에 수업은 늘 극도의 분노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학기 초에는 그 화에 압도당해 수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왜 화가 나셨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화가 나계시는구나, 이제는 화가 좀 풀리셨으면, 하며 수업을 들었다는 정도만 기억에 남아버렸다.
여차저차 A학점을 받고 학기를 마무리했지만 내 인생의 첫 여성학 수업에 대한 소감은 아쉽게도 단 한 줄로 요약되고 말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나셨을까..."
그로부터 10년 뒤 딸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나 역시 그때 그 교수님처럼, 화가 많아졌다. 전에는 별 관심 없이 흘려보냈을 뉴스였을텐데 점점 왜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지. 아마도 아이는 빛을 내는 존재이기에 세상의 어두운 면도 함께 보라 밝혀주었는가 싶다.
언젠가 전자발찌를 찬 성범죄자가 2차, 3차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사를 보았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던데, 무조건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이지!'
또 어떤 날은 아동 성범죄자에 대해 화학적 거세를 검토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화학적 거세? 죄의 근원을 뿌리째 뽑으려면 물리적 거세도 병행해야지!'
그런 생각을 말하면 주위의 친구들은 조금은 듣기 거북하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런 반응에 머쓱했던 나는 그제야 교수님께서 왜 그렇게 화가 나셨는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었다.
'세상에 화가 날 일이 넘쳐나는데도 아무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다들 그래도 된다 생각하는 거 아냐?'
라는 생각. 딸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이었다. 그런 두려움을 서른이 다 되어서야 처음 느껴봤다는 데에서는 부끄러움도 함께 느껴졌다. 나의 아내도, 엄마도, 함께 지내온 친척, 친구, 직장 동료의 상당수도 다름 아닌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딸아이가 태어나서 좋은 수만 가지 중 하나는 나처럼 판단이 흐린 사람조차 명쾌한 판단 기준을 갖게 해 준다는 점이다. 가령 남녀 간의 평균적인 임금격차가 크다는 그래프를 보면 '나는 남자라서 다행이네'라는 생각보다는 '내 아이가 자라서 사회생활을 할 때면 좀 더 동등한 대우를 받는 세상이 되어 있어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한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주요 보직에 대한 최소 여성 비율 할당과 같은 논의를 접할 때면 '남자에 대한 역차별 아냐?'라는 생각보다는 '그동안 해먹은 게 얼마인데, 이렇게라도 유리천장을 깨야 세상이 좀 바뀌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앞선다.
정답이 없는 세상만사에 '답 없는 논쟁 그만하자'며 뒤로 숨기만 할 게 아니라, '아니 그래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렇게'의 기준. 술만 몇 잔 걸치면 '2차는 좋은 데 가야지?'를 외쳐대는 사람들에게 단지 '나는 빠질게'가 아니라 거기는 좋은 데가 아니라고, 사람을 사고파는 건 범죄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 늘 화가 나신 교수님으로부터 온전히 배우지 못한 여성학 개론이었는데 딸아이가 앙증맞은 손으로 덮어둔 책의 첫 장을 넘겨주었다. 이번에는 독학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진도는 술술 더 잘 나가는 것만 같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겠어? 애꿎은 피해자만 생기겠지'
꿈쩍도 안 할 것 같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늘 변해 왔고, 지금도 변하는 중이다. 그리고 큰 변화에는 그에 걸맞은 트리거가 필요한 법.
무려 26만 명이라고 한다. 그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는 지금껏 고통받아온 피해자분들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하고 앞으로 생길지 모를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한 선물이 되기에, 세상을 변화시킬 트리거가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피해자라는 말이 여기저기 등장하지만 헷갈릴 이유는 전혀 없다. 판단 기준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딸아이의 아빠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