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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Gray Apr 30. 2020

72. 매일 밤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Week 45) 가족의 탄생


어디 가서 자신의 소싯적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면 꼰대질이라는 경멸의 눈초리를 받기 쉬운 요즘이지만, 즐겨 찾는 구독자가 있다면 예외적으로 허용되기도 한다. 매일 밤 잠들기 전, 아이는 마치 구독 버튼을 눌렀다는 듯 어김없이 옛날이야기를 해달라며 졸라댄다. 몇 주 째 학교를 가지 않아 취침시간이 늦어진 아이에게 아빠의 옛날이야기는 지루한 일상 속 달콤한 루틴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금세 소재가 고갈될 줄 알았는데 막상 아이와 침대에 누우면 새로운 에피소드가 술술 흘러나온다. 하루는 국민학생 시절로, 다른 하루는 고등학생 시절로. 어떤 날은 군대 시절로, 또 어떤 날은 대학 시절로. 하기야 이미 사십여 년을 살아버렸으니 지난날의 이야깃거리들이 고작 몇 주만에 고갈될 리는 없겠구나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관성처럼 흘러간 엊그제 내가 뭘 했나 생각해보면 딱히 떠오르는 일이 없기도 하니 시간과 기억 간에 절대적인 상관관계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은 것도 같다.






수많은 이야기 중 아이가 가장 관심 있게 듣고, 또 재미있어하는 주제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학창 시절 이야기이다. 2010년생인 아이에게 들려주는 90년대 이야기는 80년생인 나로 치자면 6~70년대 이야기와 다름없는 셈이다. 주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사고나 치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 진부한 이야기지만 아이의 눈에는 처음부터 다 큰 어른이었던 아빠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한지 어느 하나 재미없는 이야기가 없다 해주니 다행이다.


다른 하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내와 내가 만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아이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에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으면서도, 아빠와 엄마의 과거를 들춰보는 기분으로 이내 이야기에 빠져들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아내와 나는 대학교 동아리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다. 당시 아내는 3학년, 나는 군 전역 후 대학 생활을 2년 남겨둔 시점에 당장 뭘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는 어리바리한 상태였다. 복학을 바로 할지, 아니면 남들처럼 고시나 회계사 준비를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기에 우선은 형이 소개해준 아르바이트로 돈을 좀 모으는 동시에 여름 계절학기나 한 과목 들으며 학교 생활을 대한 감을 잡아가고자 했다.


그 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나는 1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 날의 감정을 너무나도 생생히 기억한다. 인테리어 현장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바로 수업을 들으러 온 터라 나는 군복 바지에 헐렁한 검정 티셔츠를 한 장 걸친 채 교정을 걷고 있었다.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 허름한 차림으로 처음 학교에 온, 하필이면 그 날 지금의 아내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말끔한 보라색 폴로티에 청치마를 입은 아내는 내게 짧은 인사를 건네 왔고, 추리한 복장의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몇 마디 간단한 인사만을 나눈 뒤 서둘러 자리를 피하였는데,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처음엔 그저 부끄러움인 줄만 알았건만 훗날 생각해보니 부끄러움과 설렘,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감정이었나 보다. 한참을 지나 물어보니 아내도 그날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한다. 왜 그렇게 어쩔 줄 몰라했냐며.


이게 엄마 아빠의 시작이라고 말하면 아이는 조금은 싱겁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더 근사하게 포장해서 말해줄 만한 시작에 대한 기억이 없다. 아니, 어쩌면 이보다 더 근사한 시작은 찾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작은 설렘 하나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뒤의 일들은 '우리 왜 그랬지?'라며 따져볼 겨를도 없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흘러만 갔다. 우리는 금세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누가 먼저 말하진 않았지만 그게 순리라는 듯 서둘러 결혼에 골인했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이를 갖게 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지 어느새 십 년이 넘었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작은 설렘 하나가 결국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셈이다.


가끔씩 아이가 묻는다. 그날 아빠와 엄마가 만나지 못했으면 자신은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한 게 아니냐고. 만약 둘 중 한 명이 수능을 더 잘 보거나 못 봐서 다른 학교에 들어갔더라면, 아니면 같은 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이의 걱정 어린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좀 느끼하게 들리긴 하겠지만, 마찬가지로 더 근사한 말을 찾아내기는 힘들 것 같다.


"글쎄, 아빠 생각에는...

아빠는 엄마를 만났을 것 같아.


그게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우연히 만나서

그날처럼 설레고

금세 사랑에 빠져서

결국 우리 딸을 만났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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